우기로 접어들고부터 동면에 들어간 곰처럼 거의 매일 자신의 동굴속 컴퓨터 앞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만 있는 모모를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나는 조용히 계획을 세웠다. 집에서 40-50분 거리인 론다(Rhondda)계곡을 탐방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타운을 벗어나자 해안가 철강공장의 굴뚝이 천천히 뒤로 물러난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 위로 희미한 김이 피어오르고, 커브마다 낭떠러지가 불쑥 나타난다. 젖은 양들이 풀을 뜯는 언덕, 비에 젖은 회색 벽돌의 폐가를 스쳐 지나간다.
Afan Forest의 짙은 숲이 차창 너머로 미끄러지고, 공기에는 쇠와 바다의 냄새 대신 젖은 흙과 낙엽의 향이 감돈다. 구름 그림자가 능선을 덮었다가 걷어내는 순간, 산이 숨을 쉬는 듯 느껴진다. 오르막이 끝날 즈음, 도로는 하늘과 맞닿은 능선으로 이어진다. 아래로는 수십 겹의 계곡이 안개 속에 겹겹이 내려앉아있다. 이곳이 비웰치(Bwlch Mountain) 정상이다.
⇲ Port Talbot에서 시작한 우리의 하이킹 코스
그 고갯마루를 넘자, 론다의 풍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남쪽의 산업도시를 뒤로하고, 북쪽의 회복된 숲과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 그 경계 위에서 바람은 여전히 매섭고, 산의 초록빛은 거칠면서도 단단하다.
한때 이곳 인스웬(Ynyswen)과 트레오키(Treorchy) 계곡의 중심에는 버버리(Burberry) 봉제공장이 있었다. 론다의 여성들은 바늘과 실로 세계의 럭셔리를 만들어 냈고, 트렌치코트 한 벌이 완성될 때마다 마을에는 따뜻한 온기가 돌았다.
그러나 공장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던 어느 해, 재봉틀 소리는 조용히 멈추었다.
그 시절 공장 옆에는 ‘버버리 팩토리 샵’이 있었다.
공장에서 나온 샘플품이나 약간의 하자가 있는 트렌치코트와 셔츠를 반값에 살 수 있었던 그곳은, 주말마다 사람들로 북적였다.
“버버리 세일한대!”라는 소문이 돌면 계곡 아래까지 자동차 행렬이 이어졌고,
론다의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서도 가게 앞에는 웃음소리와 흥정이 끊이지 않았다.
재봉틀은 멈췄지만, 그때의 온기와 활기는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이 땅은 검은 갱도의 나라였다. 이제는 가문비나무와 소나무가 그 흔적 위를 덮고 있다. 빗방울이 젖은 가지에서 떨어질 때마다, 닫힌 탄광의 심장처럼 깊고 묵직한 울림이 느껴진다.
웨일스 론다 계곡에서는, 오래전 광산으로 훼손된 땅을 되살리기 위해 지역 공동체와 환경 단체가 힘을 모아 숲을 복원하는 프로젝트가 이어졌다. 사람들의 손으로 파낸 땅은 이제 다시 메워지고, 초록으로 살아나고 있다.
낙엽이 두텁게 깔린 길 위에는 흙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고, 나무 기둥마다 초록빛 이끼가 퍼져 있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파도처럼 출렁이고, 그 사이로 붉은 솔개 한 마리가 우아하게 원을 그리며 솟구친다. 마치 오래된 땅이 천천히 숨을 고르고, 다시 살아나는 순간을 지켜보는 듯하다.
갱도의 시절 & 회복된 숲경사가 가팔라지며 바위가 드러나는 곳, 이곳이 바로 펜 피크(Pen Pych), 론다 계곡의 끝이다. 론다 사람들은 이곳을 ‘The Balcony of Rhondda(론다의 발코니)’라 부른다.
절벽 가장자리에 서면 Treorchy와 Ynyswen이 발아래 펼쳐진다. 하루 일을 마친 광부들은 이 언덕 위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곤 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마을의 불빛은 고된 하루를 버텨낸 사람들에게 조용한 위로였다. 그 위로가 노래가 되어, 1883년 Treorchy Male Voice Choir(트레오르치 남성합창단)이 태어났다.
갱도의 먼지와 피로를 이겨낸 목소리들은 이 계곡의 자부심이 되었고, 지금도 웨일스의 심장처럼 울린다. 광산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노래는 여전히 이 계곡 어딘가에서 바람을 타고 흐른다
절벽 아래로는 작은 폭포가 보인다.
바위 위로 흘러내리는 물은 계곡의 고요를 깨우며, 한때 광부들의 땀과 먼지가 스며 있던 이 땅 위를 맑게 씻어내린다. 그 물소리는 마치 땅이 다시 자신의 언어를 되찾는 듯하다.
능선을 따라 북동쪽으로 향하면 크레이그 이 린(Craig y Llyn)의 암벽이 나타난다.
길은 점점 부드러워지고, 바위 대신 풀과 늪이 이어진다.
이윽고 잔잔한 물빛이 눈앞에 펼쳐진다. Llyn Fawr(큰 호수)라 불리는 곳이다.
호수 위에는 얇은 안개가 깔리고, 11월의 늦가을 햇살이 은빛으로 부서진다. 물가의 갈대는 바람에 흔들리며 마른 잎을 흘리고, 언덕 위 자작나무들은 이미 절반쯤 잎을 내려놓았다. 공기 속에는 서늘한 냄새와 함께 먼 겨울의 기척이 감돈다.
호숫가에 서면 세상이 잠시 멈춘 듯 고요하다.
바람이 물결을 흔들고, 그 물결이 다시 능선의 나뭇잎으로 번진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이 땅은 석탄의 어둠을 견디고, 다시 숲의 초록으로 돌아온 기적의 장소라고...
해가 기울자 Craig y Llyn의 그림자가 계곡으로 길게 드리워진다.
펜 피크 위에서 다시 마을을 내려다본다.
Ynyswen의 회색 지붕, 은빛 강,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새들의 울음. 광부의 노래는 잦아들었지만, 이 계곡은 여전히 사람들을 품고 있다. Burberry 공장이 사라져도, 이곳은 다시 자라날 힘을 품고 있다. 언덕 사이로 스며드는 마지막 햇살이 Ynyswen의 창문마다 황금빛을 남긴다. 모모는 조용히 그 빛을 바라보고 서있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니, 믿기지 않아.”
나는 웃었다.
“그러니까, 자주 밖으로 나와야지.”
잃은 것을 되찾고, 무너진 곳에 다시 숲을 키우는 땅. Rhondda의 길은 웨일스의 흔한 하이킹 코스가 아니었다. 산업과 자연, 인간과 회복이 겹겹이 쌓인 시간의 지형이었다. 그리고 이곳의 바람 속에는, 여전히 오래된 노래가 남아 있다.
그것이 이 땅이 가진 가장 깊은 언어인 듯싶다.
❖ 자료 사진출처 : Libries Wales(버버리공장, 탄광 모습, 합창단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