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169
CA841. 제임스 그레이, 〈애드 아스트라〉(2019)
우주 저편에서 죽었다고 믿었던 아버지(토미 리 존스)를 만난 아들(브래드 피트). 이걸 신과의 만남에 대한 비유로 읽을 수 있을까. 또는, 흔해 빠진 테마, 곧 나 자신을 만난 것으로 읽어야 할까. 하지만 그 신, 그 나는 나한테 호의적이지 않다. 신이 나한테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과 맞닥뜨린 인간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다면 그 신을, 그 나를 꼭 만나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건 내 존재나 내 생존, 또는 내 영혼을 위해서 긍정할 만한 사태일까. 어쩌면 만나는 사태는 나한테 전혀 득이 되지 않는, 아니, 완전히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런데도 기어이 만나려 하는 것은 ‘모르기’ 때문일까. 그래서 ‘알고 싶기’ 때문일까. 〈프로메테우스〉(2012, 리들리 스콧)의 그 완전히 늙어버린 피터 웨이랜드(가이 피어스) 회장처럼? 궁극의 나를 만나면 나는 과연 행복할까. 이 질문을 던질 용기, 나아가 이 질문에 대답할 용기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매우 크다.
CA842. 오승욱, 〈킬리만자로〉(2000)
인간의 위악(僞惡) 본성을 극한까지 파고 들어가기. 이런 식의 과도함이라는 드문 덕목.
CA843. 리들리 스콧, 〈글래디에이터〉(2000)
우리는 로마 제국의 검투사에 대하여, 또는 그 제도에 대하여 너무 많은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로마인의 시각으로 검투사를 볼 것이냐, 검투사의 시각으로 검투사를 볼 것이냐―. 검투사로 살아가는, 아니, 죽어가는 그들의 실존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것이 소재 이상의 것이라는 인식. 어쩌면 이 이야기를 하려고 막시무스(러셀 크로우)라는 위대한 장군을 한갓 검투사로 추락시킨 것은 아닐까. 로마 제국 5현제 가운데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리처드 해리스) 시대의 끄트머리를 서사의 출발 배경으로 삼은 것을 꼭 정치 또는 역사의 필터로만 걸러서 볼 필요가 있을까. 내가 궁금한 것은 역사나 정치가 아니라, 검투사 한 개인의 실존이다.
CA844. 오우삼, 〈미션 임파서블 2〉(2000)
무용(舞踊)으로서의 액션이 얼마나 사람의 눈을 현혹하는 데 유효한가를 오우삼은 아주 오래전에 깨우친 감독이다. 더불어, 관객이 그 깨우침의 결과에 맛을 들인 것도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한데, 사람은 언제나 그 오래되어 익숙해진 맛을 잊지 못하고 기어이 다시금 찾아다니게 마련 아닌가.
CA845. 배질 디어든, 〈사파이어〉(1959)
인간은 고작 색깔에 대한 강박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