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가난세 보고서 10

1부: 돈의 가난세 - 가난할수록 비싸지는 것들 6

by 일선

시스템의 이윤 추구 전략과 빈곤 비즈니스


유통 시스템은 이런 저소득층의 구조적 제약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이윤 창출의 기회로 활용한다. 가난한 이들의 취약성을 겨냥한 빈곤 비즈니스의 핵심 동력이다.


1. 편의점: 가장 비싼 편리함의 역설


편의점은 유통 가난세가 가장 노골적으로 징수되는 공간이다. 24시간 운영, 뛰어난 접근성, 소량 구매의 용이성은 저소득층에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다. 하지만 이 편리함의 대가는 혹독하다. 저소득층에게 편의점은 편리함을 위한 '선택'이 아니다. 대안이 부재한 상황에서의 '필수'다. 시스템은 이들의 대안 부재를 이용하여 가장 비싼 가격을 부과한다.


2. 1+1 행사의 함정과 슈링크플레이션


편의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1+1' 또는 '2+1' 행사 역시 또 다른 형태의 함정이다. 이런 행사는 언뜻 보면 할인 혜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행사 마진을 확보하기 위해 애초에 단품 가격을 높게 책정하여 단품 구매 시의 가격을 인상하는 경우가 있다. 현금 유동성이 부족해 당장 1개만 구매해야 하는 저소득층에게 불리하게 작동하는 차별적인 가격 메커니즘이다.


최근에는 가격은 그대로 두고 용량을 줄이는 '슈링크플레이션' 현상이 만연하다. 작은 용량과 총액에 익숙해진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숨겨진 인상'이다. 단위 가격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둔감한 소량 구매자들에게 더 큰 타격을 준다.


3. 소포장 전략과 1인 가구 마케팅의 허상


최근 유통업계는 '1인 가구'를 겨냥하여 다양한 소포장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이는 변화하는 인구 구조에 맞춘 합리적인 전략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가난세의 함정이 숨겨져 있다. 소포장 전략은 표면적으로는 모든 1인 가구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간과 현금이 부족한 저소득층의 소비 패턴에 최적화돼 막대한 프리미엄을 부과한다. 시스템은 '1인 가구 맞춤형'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으로 소포장 프리미엄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디지털 격차와 정책의 실패

유통 시장의 중심이 온라인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가난세'도 등장했다.


1. 온라인 시장의 진입 장벽


온라인 시장은 저렴한 가격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는 디지털 접근성과 활용 능력을 갖춘 이들에게만 해당한다. 고령층이나 극빈층은 온라인 최저가 검색과 구매에 어려움을 겪는다. 온라인 결제 시스템을 이용하기 어려운 금융 소외 계층도 많다. 고시원 거주자들은 안정적인 택배 수령지가 없어 온라인 주문을 꺼리기도 한다. 디지털 격차는 소비 비용의 격차로 이어진다.


2. 단위가격 표시제의 허점


정부는 소비자의 합리적 선택을 돕기 위해 '단위가격 표시제'를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제도는 심각한 허점도 드러내고 있다. 우선 사각지대다. 단위가격 표시 의무는 대형마트 등 대규모 점포에 주로 적용될 뿐이다. 저소득층이 주로 이용하는 편의점이나 동네 소규모 상점은 제외되거나 관리가 부실하다. 가장 정보가 필요한 소비자가 해당 정보로부터 배제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가독성과 실효성의 문제도 있다. 단위 가격은 확인하기 어렵게 작은 글씨로 적혀 있거나 기준 단위를 혼용하는 등 소비자의 비교를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행태가 만연하다.


가성비 박탈의 결과

유통 가난세는 단순히 금전적 손실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저소득층의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위협한다. 특히 건강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된다.


소포장 프리미엄과 현금 유동성의 제약은 저소득층의 식품 선택권을 심각하게 제한한다. 신선 식품은 가격이 비싸고 보관이 어려워 구매를 꺼리게 된다. 결국 저소득층은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칼로리를 채울 수 있는 식품, 즉 라면, 삼각김밥 등 탄수화물과 나트륨 함량은 높지만 필수 영양소는 부족한 가공식품을 선택하게 된다. 이는 영양 빈곤과 만성 질환으로 이어진다.


저소득층 밀집 지역에서는 신선하고 건강한 식품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마트가 부족한 '푸드 데저트(Food Deserts·식품 사막)' 현상이 발생한다. 저소득층은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건강한 식품에 접근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유통 시스템이 부과한 가난세는 가난한 이들의 건강을 갉아먹고, 이는 다시 의료비 부담 증가와 노동 능력 상실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글로벌 유통 가난세 보고서: 보편적인 착취의 메커니즘

가난할수록 생필품을 더 비싸게 사야 하는 현실, 즉 '빈곤 프리미엄'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디. 그 메커니즘은 보편적으로 작동한다. 각국의 사례는 유통 가난세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시스템에 얼마나 깊이 내재해 있는지 보여준다.


1. 영국: 선불식 에너지 요금제의 빈곤 프리미엄

영국에서는 생필품뿐만 아니라 필수 서비스인 에너지 요금에서 막대한 빈곤 프리미엄이 발생한다. 현금 유동성이 부족한 저소득층은 요금 연체를 피하기 위해 '선불 에너지 미터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사용할 만큼의 에너지를 미리 충전하는 방식인데, 단가가 일반 월정산 요금제보다 훨씬 비싸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저소득 가구는 부유한 가구보다 전기·가스 단가를 평균 10~20% 더 많이 지불했다. 선불 계량기를 쓰는 가구가 일반 요금제를 쓰는 가구에 비해 연간 100~270파운드(한화 약 16만~43만 원)를 더 부담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영국 전역으로 보면 선불 요금제로 인해 취약계층 전체가 연간 4억~10억 파운드(약 6,400억~1.6조 원)의 추가 비용을 지출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목돈(안정적인 신용과 현금 흐름)이 없기 때문에 당장 지불할 수 있는 소액 선불 방식을 선택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비싼 단가를 지불하게 되는, 한국의 소포장 구매와 동일한 구조다.


2. 미국: 식품 사막과 달러 스토어의 그림자*

미국에서는 식품 사막 문제가 심각하다. 저소득층은 접근성 제약으로 인해 비싼 유통 채널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미국 농무부(USDA) 연구에 따르면 편의점의 식료품 가격은 슈퍼마켓보다 시리얼은 25%, 빵은 10% 더 비쌌다. 이동 수단이 없는 최빈곤층은 이러한 가격을 감내해야 하며, 가장 빈곤한 사람들이 가장 비싼 장을 보는 구조가 나타난다.


최근에는 저가 상품 판매점인 이른바 '달러 스토어(Dollar General, Dollar Tree 등)'가 저소득층 지역에 급속히 확산하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빈곤 프리미엄을 야기한다는 지적이 있다. 달러 스토어는 저렴한 총액을 무기로 하지만 실제로는 단위 가격이 매우 비싼 소포장 제품 위주로 판매하며 슈링크플레이션을 통해 '숨겨진 인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3. 개발도상국의 '사셰 경제(Sachet Economy)'

개발도상국에서는 다국적 기업들이 빈곤층의 현금 유동성이 극도로 부족하다는 점을 이용한다. 샴푸, 세제, 식음료 등을 일회용 소포장(Sachet) 형태로 판매하는 '사셰 경제'가 만연하다. 단위 가격이 대용량 제품보다 몇 배나 비싼 착취적인 구조다.


나이지리아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인기 시리얼 제품인 골든모른의 경우 50g짜리 소포장 여러 개를 사서 500g을 맞추는 비용이 500g짜리 정규 포장 제품을 사는 것보다 33%나 더 비싸다. 관련 기업은 빈곤층의 절박함을 이용하여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고 빈곤층은 더 비싼 비용을 지불한다. 그뿐만 아니라 막대한 양의 플라스틱 쓰레기라는 사회적, 환경적 비용까지 발생한다.


작가의 이전글대한민국 가난세 보고서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