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가난세 보고서 23

4부: 사회 시스템은 누구를 위해 작동하는가 1

by 일선

1장 글로벌 가난세 보고서


지금까지 대한민국 사회 시스템이 어떻게 가난한 이들에게 '돈', '시간' 그리고 '몸'이라는 다차원적인 가난세를 부과하는지 추적했다. 높은 이자율, 비싼 면적당 임대료, 소포장 제품의 높은 단가, 장시간의 통근과 대기 시간까지. 이 모든 것은 가난이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이 설계한 구조적 착취의 결과였다.


이런 현상은 한국 사회에서만 발생하는 특수한 문제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가난세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내재한 보편적인 모순이다. 전 세계적으로 공통으로 발견되는 구조적 실패의 증거다. 2025년 현재, 글로벌 인플레이션과 에너지 위기 그리고 급격한 디지털 전환은 이 가난세의 징수 구조를 더욱 공고하고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사회 시스템의 형태와 복지 수준은 다를지라도, '가난할수록 동일한 재화와 서비스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기본 메커니즘은 동일하게, 때로는 더욱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영국의 '빈곤 프리미엄', 극단적인 금융 및 의료 착취가 만연한 미국의 현실, 복지국가의 이면에서 새로운 형태의 가난세가 등장하는 독일과 프랑스의 사례를 더 자세하게 알아본다. 이를 통해 가난세의 보편성을 확인하고,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의 구조적 특수성을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영국: '빈곤 프리미엄'의 발원지

'가난세'라는 개념을 사회적 의제로 정립하고 가장 활발하게 논의해 온 국가는 영국이다. 영국에서는 이를 '빈곤 프리미엄(Poverty Premium)', 즉 가난하기 때문에 추가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라고 정의한다. '페어 바이 디자인(Fair By Design)' 등의 연구는 영국 사회에 만연한 빈곤 프리미엄의 실체를 폭로해왔다.


2025년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의 저소득 가구가 지불하는 빈곤 프리미엄은 연평균 약 480~490파운드에 달한다. 이는 저소득층 가계에 막대한 부담이다. 영국 인구의 약 22%에 해당하는 1430만 명이 이 빈곤 프리미엄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 놓여 있다. 2022~2023년의 에너지 가격 폭등은 이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


영국에서 빈곤 프리미엄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영역은 에너지 시장이다. 저소득층은 신용도가 낮거나 소득이 불규칙해 가장 저렴한 단가를 제공하는 '자동이체(Direct Debit)'를 유지하기 어렵다. 대신 '선불 요금 미터기(Prepayment Meters, PPMs)'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치명적인 함정이 있다. 선불 미터기에 적용되는 에너지 단가가 자동이체 방식보다 훨씬 비싸다. 관련 데이터에 따르면, 선불 계량기 사용 가구는 자동이체 고객보다 연간 약 131파운드를 더 지불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현금 유동성이 부족한 가구가 가장 비싼 단가로 에너지를 '소량 구매'하는 구조다. 유통 가난세의 메커니즘과 정확히 일치한다.


에너지 요금 폭등 이후, 난방비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전기를 끊는 '자가 단전(Self-disconnection)' 사례가 사회적 문제로 떠올리기도 했다. 2023년 기준 잉글랜드에서만 약 317만 가구(전체의 13%)가 적절한 난방을 하지 못하는 연료 빈곤(Fuel Poverty)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연료 빈곤 가구가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비용 감소분(에너지비용 격차)은 2020년 대비 2023년에 무려 47% 급증했다.


사회 시스템은 가장 에너지가 절실한 사람에게 가장 비싼 단가를 부과하며 생존을 위협했다. 이에 영국 에너지규제기관(Ofgem)은 만 85세 이상 노인 가구 등에 강제적인 선불계량기 설치를 금지하는 조치를 도입했다. 저소득층 대상 사회적 에너지요금제(Social Tariff) 도입 논의가 진행 중이다.


금융 시스템에서 배제 역시 심각한 빈곤 프리미엄의 원인이다. 특히 보험 시장에서의 차별은 구조적이다. 첫째, '우편번호 페널티(Postcode Penalty)'다. 보험사들은 저소득층 밀집 지역의 높은 범죄율 등을 근거로 보험료를 높게 산정한다. 그 결과, 단지 가난한 동네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연간 평균 298파운드의 추가 자동차 보험료를 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구조적 불평등을 개인의 비용으로 전가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둘째, '월납 할증(Installment Penalty)'이다. 목돈이 없는 저소득층은 보험료를 매달 분할 납부할 수밖에 없다. 이때 보험사들은 과도한 할증료를 부과한다. 월납 방식의 총액은 일시불보다 10~20% 이상 비싸며, 연 환산 이자율(APR)이 30%에 육박한다. 이는 "현금이 없으면 벌금을 문다"는 격언처럼 유동성 부족에 대한 명백한 벌금형 가난세다.


주류 금융 이용이 어려운 계층은 '렌트 투 오운(Rent-to-Own)'과 같은 고비용 신용 시장으로 내몰린다. 300파운드짜리 세탁기를 최종적으로 1,000파운드 이상 지불하는 등 정상 가격의 3~4배에 달하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이 방식은 연 환산 이자율이 수백 퍼센트에 달하는 약탈적 대출과 다름없다.


최근 영국에서는 디지털 접근성 부족이 새로운 빈곤 프리미엄의 핵심 요인으로 부상했다. 인터넷을 전혀 쓰지 않는 가구가 약 6~11%로 추정된다. 이들은 온라인 전용 할인이나 저렴한 요금제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된다.


많은 서비스가 온라인 이용 시 최대 25%까지 저렴하며, 종이 청구서나 대면 서비스를 선택하면 추가 수수료를 물게 된다. 영국 공정사회위원회(CSJ) 보고서는 디지털 미접근으로 인한 빈곤 프리미엄이 연간 약 500파운드에 이른다고 지적한다.


이는 금전적 비용뿐만 아니라 막대한 시간세로 이어진다. 디지털 약자는 온라인으로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업무를 위해 관공서나 은행에서 오랜 시간 줄을 서야 한다. 예를 들어, 관련 조사에서 디지털 미숙련 고령층의 33%는 관공서 서비스 이용이 어렵다고 답했다. 정부는 초저가 사회적 인터넷 요금제(social broadband tariff)를 도입했다 하지만 자격이 되는 가구의 90%가 이를 모르거나 신청하지 않아 실효성에 한계가 있었다. 디지털 격차는 21세기에 가장 빠르게 확산하는 가난세다.


미국: 시장 만능주의가 낳은 극단적이고 잔인한 가난세

미국은 가장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다 하지만 공적 안전망이 취약하고 시장 만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가난세는 더욱 노골적이고 잔인한 형태로 나타난다. 2025년 기준 미국은 3,770만 명(인구의 11.5%)이 공식 빈곤선 이하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들은 빈곤 자체를 수익화하는 산업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가난세 징수 메커니즘은 '페이데이 론(Payday Loan)'이다. 이는 급여일을 담보로 소액을 빌려주는 초단기(보통 2주) 대출이다. 이 대출의 비용 구조는 충격적이다. 100달러당 15달러 수준의 수수료를 연 환산 이자율(APR)로 계산하면 평균 391%에 달하며, 일부 주에서는 600%를 초과하기도 한다.


한국의 법정 최고금리(20%)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살인적인 고금리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부채의 덫'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이용자의 80% 이상이 대출을 연장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약 1200만 명의 미국인이 이 대출을 이용하고 있다. 현재 50개 주 중 20개 주만이 이자율을 36% 이하로 제한하고 있을 뿐이다. 사회 시스템은 가난한 이들의 절박함을 이용해 천문학적인 이윤을 창출하고, 그들의 재기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금융 시스템에서 배제된 '언뱅크드(Unbanked)' 문제도 심각하다. 2023년 기준 약 500만 가구(4.2%)가 은행 계좌가 없다. 이들은 급여 수표를 현금화하기 위해 '체크 캐싱(Check Cashing)' 업체를 이용하며 수표 금액의 1%에서 최대 12%까지 수수료로 지불한다. 자신이 번 돈을 사용하기 위해 매달 수십 달러의 세금을 내는 셈이다. 사회 시스템은 주류 금융 시스템의 문턱을 높여 가난한 이들을 배제하고, 고비용의 대체 금융 시장으로 밀어 넣어 이중의 이윤을 착취한다.


미국 사회의 가난세가 가장 잔인하게 드러나는 영역은 의료 시스템이다. 민영화된 의료 시스템은 저소득층에게 의료 서비스를 사치품으로 만든다. 현재 약 2,800만 명(8.6%)이 건강보험 미가입 상태다. 보험이 있더라도 높은 자기부담금 때문에 저소득층은 예방과 조기 치료를 포기하고, 결국 응급실에서 천문학적인 비용을 청구받는다.


이는 가계를 파탄시키고 '의료 파산(Medical Bankruptcy)'으로 이어진다. 하버드대 연구에 따르면 파산 신청 가구의 66.5%가 질병 또는 의료비를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한 해 50만 가구가 의료비 때문에 파산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중산층이 의료비로 인해 순식간에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메디컬 푸어'를 양산한다.


특히 처방 약 비용은 심각한 문제다. 당뇨병 환자의 인슐린 가격 폭등이 대표적이다. 2023년 연방정부가 메디케어 인슐린 가격을 월 35달러로 상한 설정했다. 하지만 민간보험 가입자나 무보험자는 여전히 혜택을 받지 못한다. 일리노이주나 뉴욕시 등에서 의료부채 탕감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있지만, 이는 시스템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미국의 극심한 경제적 분리는 주거 공간의 불평등을 낳고, 이는 다양한 형태의 가난세로 이어진다. 주거비 부담은 구조적 역진성을 띤다. 2023년 기준 미국 전체 임차 가구의 50%(2,260만 가구)가 소득의 30% 이상을 주거비로 쓰는 '과부담' 상태였다. 27%(1,210만 가구)는 소득의 절반 이상을 지출하는 심각한 상황이다.


특히 주목할 현상은 '식품 사막(Food Deserts)'이다. 신선하고 저렴한 식료품을 판매하는 대형 슈퍼마켓이 부족한 저소득층 밀집 지역을 의미한다. 이 지역 주민은 소규모 상점에서 비싼 가격에 식료품을 구매할 수밖에 없다. 디트로이트의 한 빈곤 지역 조사에서는 같은 식품 바구니의 가격이 교외 대형마트보다 20% 이상 높았다.


비용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식료품을 구매하기 위해 멀리 떨어진 마트까지 이동해야 할 경우, 막대한 시간과 교통비를 지불해야 하는 '시간 가난세'가 발생한다. 도시 거주비가 감당이 안 돼 외곽으로 밀려난 저소득층은 장거리 통근에도 시달린다. 편도 90분 이상 통근하는 '슈퍼 커뮤터(Super Commuter)'는 360만 명에 달하며, 이들은 연간 1개월 치를 통근에 소비하는 셈이다. 시스템은 공간을 차별적으로 배분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시간 비용을 약자에게 전가하고 있다.


미국 저소득 가구의 에너지 빈곤(Energy Insecurity)도 심각하다. 2020년 기준 27%의 가구(3,400만 가구)가 에너지 비용 부담 또는 난방 부족을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이 비율은 더욱 상승했다. 연방정부의 에너지보조프로그램(LIHEAP)은 예산 한정으로 에너지 빈곤 가구의 22%만 지원된다.


디지털 격차 또한 뚜렷하다. 저소득층의 22%는 가정에 인터넷이 없으며, 41%는 컴퓨터를 갖고 있지 않다. 이는 구직, 교육, 의료 기회의 박탈로 이어진다. 인터넷 미이용으로 인해 기본 생필품과 서비스에 평균 25%의 가격 프리미엄이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정부는 인터넷 요금 보조 프로그램(ACP)을 시행 중이다. 하지만 신청 과정이 복잡해 신청자의 45%가 중도 포기했다는 조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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