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유로 만드는 나의 세상, 그리고 초월적 존재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한 단 한 가지를 꼽자면, 나는 단연 ‘사유’를 꼽을 것이다.
1.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
2. 개념, 구성, 판단, 추리 따위를 행하는 인간의 이성 작용.
당연히 많은 부분에서 영향을 받겠지만 인간은 단순히 생물학적 & 화학적 메커니즘에 의해서, 진화와 본능에 의해서만 행동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유하며 행동하고 오직, 인간만이 사유하며 행동한다.
우리는 사유하며 이치와 원리를 알아내고, 논리와 개념을 정립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등 이성을 활용한다. 그리고 신념, 의미, 옳은 일, 선, 욕망 등 자신만의 것들이 만들어지고, 자신만의 기준, 원하는 방향 등이 정해지며 그에 따라 행한다. 그렇게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고유한 한 개체로서 의미를 갖고 살아간다. 인간다움을 듬뿍 가진 채.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사유는, 이러한 인간다움은 희미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물질만능주의사회, 능력주의사회 안에서 끝없는 위협에 처하며 경쟁하고 비교한다. 위협에 처한 인간은,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생존을 최우선시하며 행동한다. 비록, 그 위험이 실제 생명의 위협이 아니며 만들어진 위험일지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더를 외치며 허상의 적, 계속해서 점점 더 강해지는 적과의 싸움을 위해, 생존을 위해 전쟁같은 삶을 살아간다. 이 때의 삶은 전투와 잠깐의 쉼(휴식)뿐이다.
사유는 사치이며 어느 새인가 잊혀졌다. 단지 생존을 위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여러 방법론과 성공 공식만이 중요해졌을 뿐이다. 게다가 방법론과 성공 공식이 특정한 누군가에게는 효과적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 혹은 대다수에게 효과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존재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위험이 코앞에 있다고 느끼기에 생존에 급급하여 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사려깊게 고려하기 보다는 대다수가 따르는 길, 옳다고 여겨지는 길을 따르곤 한다.
그리고 그것을 따르는 것만해도 충분히 벅차다. 그렇기에 무언가 자신만의 의미, 신념이 존재하기란 쉽지 않으며, 오로지 생존 혹은 승리만을 위해 달려간다. 중요도와는 관계없이.
무엇을 위해, 왜 살아가는가? 또, 세상의 많은 것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떤 특성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사유의 대상은 무한하고 그 자체로도 의미있으며,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든지 사유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다만, 사유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타인이 만든, 타인의 세상에서 살아가게 된다.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우리의 삶에는 합의를 통해 정의된 개념과 누군가로부터 전달된 타인의 생각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의미, 나만의 독창적인 생각과 해석이 없는 것이고, 나의 세상이 없는 것이다.
무미건조하게 본다면 우리에게 의미란 것은 존재하지 않고, 우리는 단지 생물학적으로 태어났기에 살아간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이 그냥 태어났기에 죽지 않았기에 살아간다고. 하지만, 분명히 인간에게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유’가 존재한다. 우리는 아무런 목적과 의미가 없는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선과 악처럼 세상에 절대적인 개념으로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정의할 수도 있다. 다양한 생각과 해석을 통해 자신만의 세상을 구성하고 만들어갈 수 있다.
삶, 인간, 사랑, 우정, 선 등에 대해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고 독특하게 해석할 수도 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저마다의 멋지고 의미있는 세상을 구성하고 만들어나가며, 자신의 믿음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만의 의미를 쫓아 살아갈 수 있다.
자신만의 세상이 없다면, 우리는 누군가의 세상에서, 누군가의 해석과 의미를 추종하며 살아가고 있는 타인의 삶의 엑스트라일 것이다. 그리고 초월적 존재로 자신이 주인공이며, 자신이 가장 중요한 나의 세상이 없는 한,타인의 삶속에서 존재론적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정신없는 전투속에서도 이따금씩 여유는 생기기 마련이고 존재론적 불안은 계속해서 찾아온다. 누군가는 이를 더한 바쁨으로 불안을 없애기도 하고, 누군가는 쾌락을 통해 이러한 불안을 제거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세상이 없는 한 이러한 존재론적 불안은 절대 없어질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우리는 서로 협력하고 긴밀하게 지내며 타인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또한,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관찰하고 따라하며 여러 가지 것들을 익혔고, 인류는 타인의 지식과 통찰을 배우며 문명을 탄생시켰다. 우리는 타인을 보고 관찰하며 타인을 통해 배우기도 하고 큰 영향을 받는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것이 더욱 더 강해졌다. 기술의 발전으로 더 쉽게 더 넓게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다. 그로 인한 여러 혜택도 있지만, 우리는 더 많은 비교를, 더 많은 위협을 받기도 하며 더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건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곧 생존을 위한 전쟁을, 쳇바퀴 같은 생존 전투를 시작한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사유가 희미해지고 없어지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한 틈과 여유가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대다수가 생존과 경쟁에 집중하고, 그것에 대해 소리친다. 대다수에는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친구 등 지인들까지 포함된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존재인 주변인들도 그러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다른 생각을 품는 것은 쉽지 않다.
전쟁같은 일상속 자극적인 콘텐츠는 무궁무진하게 넘쳐난다. 그것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세상의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사유할 틈을 내어주지 않는다. 심사숙고를 하며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사유와 달리, 콘텐츠는 클릭 외에는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으며 즉각적인 보상도 제공한다. 우스갯소리지만 아마 과거의 철학자들이 현대사회에서 살아간다면 그들도 과거와 같은 수준과 양의 지혜와 통찰을 공유해주기란 어려웠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졌다고 한들, 그 중요성은 변함없으며 오히려 더 중요할 수 있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우리 자신만의 의미를, 해석을 통해 고유한 세상을 만들고, 그 속에서 창조자이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고유하고 가장 위대하며 초월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타인의 세상 속에서 존재론적 불안을 느끼며 바쁨과 쾌락으로 이를 잊기 위해 노력하며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 세상에서는 타인들은 엑스트라로, 아무리 그 수가 많다고 한들 우리를 흔들 수는 없다. 그 세상에서는 타인들의 다양한 시각과 해석이 우리에게 영감을 줄 수 있을 지언정, 그것에 우리가 송두리째 흔들리지 않는다. 다수의 생각에, 다수의 정답에, 다수의 판단에, 다수가 따르는 길에 흔들리지 않는다. 아니 모든 판단의 잣대와 주체가 자신이기에 흔들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나만의 것들이 단단해지기까지 흔들릴 수 있으며, 단 번에 단단해질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고유의 존재를, 인간다움을 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점점 더 불안을 벗어던지며 자신만의 세상을 굳건히 계속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질문에 의해, 스스로의 답에 의해 형성될 것이다. 질문에 자신만의 답을 해보고, 자신만의 해석으로 여러 개념들의 다양한 특성들을 스스로 생각해보면서 말이다.
이같은 과정은 쉽지 않다. 우리 안에는 아직 우리 고유의 것보다 타인의 지혜, 통찰, 해석 등이 많기에 그것들을 표면적으로 우리의 것인양 꺼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스스로 고유한 해석을 하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며, 정답이 없는 문제이더라도 다수의 답을 편안하게 느끼기에 타인들의 답을 찾아보려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역시도 분명히 잘 해낼 것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답을 만들며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은 분명히 기쁘고 재미있고 흥미로우며 충만한 느낌을 줄 것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은 무엇이 되었건 그 자체로 멋지고 인간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나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며 그 세상에서 초월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의 불안과 흔들림이 줄어들며 존재론적 불안으로 생겨난 세상의 암, 어둠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우리가 인간답게, 충만하게 살아가며 우리 개개인 모두 엄청나게 빛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