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시끄럽게 불일치해야 한다

진보 정치에 필요한 불편한 성숙에 대하여

by 깡셉



1. 왜 우리는 분열을 두려워하게 되었는가


합의라는 미덕이 남긴 공백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의 정치이론은 언제나 한 가지 불편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왜 그렇게까지 합의를 믿어왔는가. 자유주의 정치이론은 오랫동안 합의를 민주주의의 이상으로 상정해왔다. 갈등은 미성숙의 징후였고, 분열은 극복해야 할 결함이었다. 정치란 이성적 토론을 통해 공통의 해법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그려졌고, 그 과정에서 감정은 가능한 한 배제되어야 할 요소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무페는 이 오래된 미덕이야말로 정치의 핵심을 비워냈다고 말한다. 사회에는 결코 최종적 합의도, 보편적 이성도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질서라고 부르는 것들 역시 특정한 권력 관계가 잠시 고정된 결과일 뿐이다. 합의는 도착점이 아니라, 갈등이 잠시 보이지 않게 정렬된 상태에 가깝다. 문제는 우리가 그 상태를 너무 오래 지속 가능한 것으로 착각해왔다는 점이다.


갈등을 지운 정치, 감정이 돌아온 자리

무페가 보기에 자유주의는 갈등을 제거하려는 순간 스스로를 위태롭게 만든다. 적대성은 사라지지 않고 억압된 채 잠복하며, 결국 더 왜곡된 형태로 귀환한다. 포퓰리즘, 냉소, 혐오 정치가 그 결과다. 여기서 중요한 매개가 바로 정동이다. 사람들은 이성적 계산으로 정치적 주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분노하고, 소속감을 느끼고, 배제당했다는 감각에 반응하며 ‘우리’와 ‘그들’을 구분한다. 무페는 좌파가 이 정동의 차원을 외면할수록, 그 에너지는 우파에 의해 더 능숙하게 조직된다고 본다. 합리성과 품위를 앞세운 정치가 남긴 것은 안정이 아니라 공백이었고, 그 공백을 채운 것은 언제나 감정이었다. 다만 그 감정은 제대로 말해지지 못한 채, 더 거칠고 단순한 언어로 돌아왔다.


한국 진보의 익숙한 문장들

이 이론은 추상적이지 않다. 한국 진보 정치의 언어 습관을 떠올려보면, 무페의 진단은 거의 체감에 가깝다. “우리는 분열하면 안 된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다” “감정적으로 말하지 말자” 같은 문장들은 언제나 전략과 책임의 이름으로 호출되어 왔다. 그 문장들은 분열을 막기 위한 장치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갈등을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규율로 작동했다. 논쟁은 배신으로 오해되었고, 감정은 미성숙의 징표로 낙인찍혔다. 그 결과 진보는 점점 더 이성적이 되었지만, 동시에 점점 더 말할 수 없는 것이 많아졌다. 무페의 표현을 빌리자면, 적(enemy)을 만들지 않으려다 적대적 상대(adversary)조차 허용하지 않는 상태에 가까워졌다. 갈등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하로 내려갔을 뿐이었다.


이론이 체감이 될 때

정치이론이 힘을 갖는 순간은, 그것이 설명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으로 다가올 때다. 무페의 사상은 한국 진보의 오래된 불안을 낯설게 만든다. 분열은 정말 패배의 다른 이름이었을까. 감정은 정말 통제되어야 할 위험이었을까. 혹시 우리가 두려워했던 것은 분열 그 자체가 아니라, 분열을 다룰 언어와 형식을 갖지 못한 상태는 아니었을까. 이 질문들이 제기되는 순간, 정치의 장은 다시 열리기 시작한다. 합의를 미덕으로 삼아 닫혀 있던 공간에, 갈등과 정동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비로소, 이론은 한국의 특정한 풍경과 만날 준비를 마친다.




2. 감정이 공론장에 등장했을 때


정동을 통과시키는 형식의 등장

무페의 이론이 한국 정치의 맥락에서 생생해지는 지점은, 그것이 특정한 인물의 말투나 태도, 리듬과 만날 때다. 합의와 품위를 중시해온 진보 정치의 공론장에는 오랫동안 하나의 공백이 존재했다. 분노는 사적인 감정으로 밀려났고, 확신은 독선으로 오해되었으며, 의심은 불화의 씨앗으로 관리되었다. 이 공백을 메운 것이 단순한 정보나 분석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형식이었다. 김어준이라는 이름으로 호출되는 형식은, 진보 정치가 말하지 못했던 정동을 숨기지 않고 통과시키는 통로로 작동했다. 그는 이성의 언어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정동과 분리하지도 않았다. 분노는 분노인 채로, 의심은 의심인 채로, 웃음은 웃음인 채로 공론장에 등장했다. 그 순간 정치적 발화는 더 이상 완결된 주장이라기보다,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장면이 되었다.


속 시원함이라는 정치적 감각

사람들이 김어준의 발화를 들으며 느꼈던 속 시원함은 지식의 충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허용의 감각에 가까웠다. 이렇게 느껴도 괜찮다는 승인, 이렇게 말해도 배제되지 않는다는 신호. 무페가 말한 정동의 정치화는 바로 이런 순간에 실현된다. 정치적 주체는 설득을 통해 만들어지기보다, 정서적 동일시를 통해 형성된다. 김어준의 발화는 관객을 논리적으로 이기려 하지 않았고, 대신 감정의 좌표를 분명히 했다. 나는 이 편에 서 있고,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는 명시성은 중립을 가장한 도덕적 우월감보다 훨씬 정직한 방식이었다. 그 명시성 덕분에 대화의 경계는 오히려 확장되었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조차,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논쟁의 장인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선 없는 편듦과 아고니즘*의 조건

무페가 자유주의 정치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본 것은, 적대성을 숨긴 중립의 언어였다. 김어준의 형식은 이 지점에서 분명한 대비를 이룬다. 그는 중립을 가장하지 않았고, 자신의 편듦을 숨기지도 않았다. 이 태도는 종종 분열을 조장하는 것으로 비판받았지만, 실제로는 아고니즘의 최소 조건을 충족시키는 방식이었다. 적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상정하지 않으면서도, 차이를 흐리지 않는 것. 진보 진영 내부에서 김어준이 불편한 존재로 읽힌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그는 분열을 만들었다기보다, 이미 존재하던 균열을 가시화했다. 억눌려 있던 감정과 노선의 차이가 그의 형식을 통해 표면으로 올라왔고, 그 과정이 준비되지 않은 이들에게는 적대성으로 오인되었다.

*아고니즘(Agonism) : 샹탈 무페에 따르면, 아고니즘이란 갈등을 제거하려 하지 않고 서로를 적이 아닌 적대적 상대로 인정한 채 그 갈등이 폭력으로 전환되지 않도록 조직하는 민주주의의 방식이다.


형식은 사라지지 않고 번식한다

그러나 형식은 개인과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무페의 언어로 말하자면, 하나의 헤게모니적 형식은 언제나 도전과 변형을 통해 유지된다. 김어준 이후의 풍경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의 말투를 복제하는 후계자는 없지만, 그가 넓혀놓은 정동의 영토 위에서는 새로운 목소리들이 자라나고 있다. 임경빈의 직설은 정동을 해설하지 않고 곧장 발화함으로써 아고니즘의 좌표를 더욱 또렷하게 긋는다. 최욱의 유쾌함은 분노와 비판을 웃음과 놀이의 형식으로 번역하며 더 넓은 참여를 가능하게 한다. 이들은 김어준처럼 말하지 않지만, 김어준이 가능하게 만든 조건 위에서 말한다.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공간, 편을 드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태도, 틀릴 위험을 감수해도 발화할 수 있는 공론장. 이것이 바로 형식의 계승이며, 진보 담론 생태계가 단일한 목소리에서 다중의 리듬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징후다.





3.아고니즘의 부재, 혹은 미완의 실험


형식은 열렸지만, 구조는 따라오지 않았다

김어준 이후의 풍경은 분명 변했다. 정동은 더 이상 완전히 금기어가 아니고, 분노와 웃음, 확신과 조롱은 진보 담론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 변화가 곧바로 안정적인 담론 구조로 이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무페의 관점에서 보자면, 문제는 정동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조직하느냐에 있다. 한국 진보는 정동의 필요성을 체감했지만, 그 정동을 제도화하거나 규칙화하는 데에는 여전히 서툴다. 그 결과 정동은 다시 한 번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게 되고, 형식은 확장되지만 구조는 반복된다. 김어준이라는 형식이 번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특정 인물의 발화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인물이 흔들릴 때 담론 전체가 불안정해지는 상황을 목격한다.


아고니즘의 부재, 혹은 미완의 실험

무페가 말한 아고니즘은 단순히 시끄럽게 싸우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적대적 상대를 인정하면서도, 그 갈등이 지속 가능하도록 만드는 제도적·상징적 장치를 포함한다. 한국 진보의 문제는 정동의 분출이 종종 이 장치 없이 발생한다는 데 있다. 감정은 빠르게 확산되지만, 그 감정을 서로 다른 노선과 전략으로 번역하는 과정은 충분히 마련되지 않는다. 그래서 논쟁은 쉽게 인신공격으로 오해되고, 비판은 금세 진영 내부의 균열로 해석된다. 싸움은 시작되지만, 끝까지 갈 수 있는 규칙은 부재한 상태. 이때 다시 등장하는 것이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다”라는 오래된 문장이다. 정동이 열어젖힌 문은, 그 문을 관리할 언어가 없다는 이유로 다시 닫힌다.


개인화된 정동의 위험

우리는 종종 문제를 너무 인간적으로 이해한다. 특정 스피커가 과하다거나, 누군가는 너무 직설적이고 누군가는 너무 가볍다는 식의 평가가 난무한다. 하지만 무페의 시선에서 보면, 이는 개인의 성향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정동이 개인에게 과도하게 귀속될 때, 그 정동은 쉽게 소진되고 왜곡된다. 발화자는 감정의 대리인이 되고, 청자는 감정의 소비자가 된다. 그 사이에서 정치적 상상력은 오히려 줄어든다. 김어준 이후 등장한 여러 목소리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정동을 풀어내고 있음에도, 그들이 여전히 ‘캐릭터’로 소비되는 순간, 형식은 다시 인물 숭배나 인물 혐오의 프레임에 갇힌다. 이것은 무페가 경계했던 탈정치화의 또 다른 얼굴이다.


왜 진보는 늘 개인에게 기대는가

이 질문은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다. 왜 한국 진보는 정동을 다룰 때마다 제도가 아니라 사람을 찾는가. 왜 하나의 형식이 자리 잡기도 전에, 우리는 또 다른 ‘대표 스피커’를 요구하는가. 아마도 그 이유는 진보가 여전히 합의의 이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갈등을 관리하는 구조를 만드는 대신, 갈등을 대신 말해줄 인물을 찾는 습관. 이것은 단기적으로는 속 시원함을 제공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담론의 자율성을 약화시킨다. 무페의 언어로 말하면, 헤게모니를 둘러싼 투쟁이 개인의 카리스마로 축소되는 순간, 민주주의의 역동성은 다시 위태로워진다.




4. 더 잘 조직된 불일치를 위하여


싸움을 없애는 정치가 아니라, 싸울 수 있게 하는 정치

샹탈 무페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태도에 가깝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제거하는 기술이 아니라, 갈등이 파괴로 변하지 않도록 조직하는 능력이라는 인식. 이 인식은 한국 진보 정치가 오랫동안 회피해온 질문을 정면으로 호출한다. 우리는 과연 싸움을 두려워한 것일까, 아니면 싸움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일까. 김어준이라는 형식, 그리고 그 이후에 등장한 여러 변주들은 이 질문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만들었다. 정동은 이미 돌아왔고, 감정은 다시 공론장의 중심부를 점유하고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것을 다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에너지가 머무를 수 있는 장을 만드는 일이다.


분열을 다른 말로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너무 오래 “분열하면 진다”라는 문장에 의존해왔다. 그러나 무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문장은 정치적 사실이라기보다 감정적 방어에 가깝다. 분열은 패배의 원인이 아니라, 관리되지 않은 갈등의 다른 이름이다. 건강한 분열은 오히려 정치의 생명력을 증명한다. 서로 다른 노선과 감정이 말로 남아 있고, 그 말들이 서로를 적으로 만들지 않은 채 긴장 속에서 공존할 때, 민주주의는 작동한다. 문제는 분열이 아니라, 분열을 말할 언어와 규칙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진보가 해야 할 일은 침묵을 강요하는 단결이 아니라, 시끄럽지만 안전한 불일치를 설계하는 것이다.


정동을 관리하지 말고, 분산하라

김어준 이후의 풍경이 보여주는 가장 긍정적인 신호는, 정동이 더 이상 하나의 목소리에 독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직설, 유쾌함, 조롱, 분노, 웃음은 서로 다른 리듬으로 분산되고 있다. 이것은 혼란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정동이 분산될수록, 정치적 에너지는 개인의 카리스마에서 담론의 구조로 이동할 수 있다. 무페가 말한 아고니즘은 바로 이 분산을 전제로 한다. 적대성을 한 지점에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장으로 나누어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보가 감정과 이성을 다시 연결할 수 있는 방식이다.


다시, 정치의 용기에 대하여

정치의 성숙함이란 언제나 불편함을 감당하는 능력과 함께 온다. 모두가 같은 말을 하지 않는 상태, 같은 속도로 분노하지 않는 상태,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 상태를 견디는 것. 그것은 피곤하고, 때로는 불안하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본래 그런 감정 위에서만 살아남는다. 무페의 이론이, 그리고 김어준 이후의 형식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더 많은 확신이 아니라 더 많은 용기다. 말할 용기, 들을 용기, 그리고 끝내 합의하지 못한 채 함께 남아 있을 용기.



진보가 다시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조용한 합의가 아니라, 더 잘 조직된 불일치다. 그리고 그 불일치를 말로 남길 수 있을 때, 정치는 다시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