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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람 Feb 19. 2021

그놈의 커피 10잔.

알량한 자존심.

커피 10잔에 자존심을 세우던 때가 있었다. 지점장 회의가 있던 날이면 지친 모두에게 커피가 필요했다. 카페에서 사 올 때도 있지만 회의 중간에라도 '믹스 타임'은 꼭 존재했다.


"믹스 좀 타 와봐라"


그 얘기가 너무 싫었다.  어릴 때 봤던 미디어의 영향일 수도 있다. 온갖 미디어에서는 커피 타는 사무직을 존중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자주 봤기에 커피를 타는 나도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커피 타기'가 누군가의 전용 업무도 아닌데 늘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는 남자 팀장도 얄미웠다. 10잔이나 되면 조금 도와줄 법도 한테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밀려있는 업무를 혼자서만 쳐내고 있었다. 누군가는 회의를 하는데 나는 커피를 탄다. 쟁반을 가지고 한 사람 앞에 놓을 때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거나 혹은 당연하게 받아 든다. 그것도 다 싫었다. 그래도 회의 때야 그럴 수 있고 손님이 왔을 때야 그럴 수 있지만 커피 한잔 정도는 혼자 타서 마실 때도 있는데 그것 조차 일하느라 바쁜 나에게 이야기하는 게 어릴 때는 왜 그렇게 아니꼬운지. 믹스는 속 쓰려서 안 좋아했는데 타 주기만 해도 속이 쓰렸다. 다른 단에서는 커피 타기를 굳이 주임의 업무로 지정하지 않아서 기분 좋게 커피를 타 주기도 한다고 했다. 사업단 분위기도, 매사에 행동이 똑 부러지는 그 주임 언니도 부러웠다.


근무한 지 1년  정도 지난 회의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커피를 탔다. 그런데 평소 나긋나긋한 지점장님이 다가와 "주임님 물은 반만! 종이컵에 반! 그래야 맛있어"라고 하신다. 평소의 나라면 기분 나빴을 상황인데 하회탈보다 더 예쁘게 웃으며 부드러운 사투리로 말해서 첫 번째로 웃음이 났고 두 번째로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 종이컵에 믹스커피 하나에 물을 70%나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커피포트는 2~3번 데워야 했고 커피 주문은 늘 밀렸다. 그걸 지점장님들이 1년이나 아무 말 없이 마신 거다. 물 조절이 안된 커피는 마시나 마나인데 그나마의 커피도 뾰로통해서 타는 내 모습에 아무도 물 조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나 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람마다 물 양이 다 다른 걸 알았지만 믹스커피에도 정량의 물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믹스커피에도 배움이 있네 싶어 그저 웃음만 났다. 마치 내가 커피 타기 싫어서 일부러 물을 한껏 부어준 것 같았다. 묘하게 퍼지는 통쾌함과 괜스러운 죄송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사실 일하면서 정이 드니 커피야 10잔이고 20잔이고 태워줄 수 있지만 중요한 건 이걸 진짜 내가 해야 할 업무로 생각했다는 거다. 어느 날 오랫동안 직장에 몸담으셨던 前 대표님이 사업단에 오셨다. 평소처럼 "커피 드릴까요? 차로 드릴까요?" 물으러 들어갔다. 前 대표님은 "괜찮아요, 제 커피는 제가 타 먹을게요"라고 서울말투로 이야기하신다. 순간은 머쓱하긴 했지만 세련되고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지긋한 나이에도 텀블러에 마실 걸 챙겨 오거나 하셨다. 이 곳 위치에 어두우니 "타드릴께요~" 하고 타드릴 때도 있었지만 업무가 아니라 내가 커피를 타드릴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나를 커피 타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고마웠다. '커피 타기' 그게 뭐라고 누군가는 자존심을 세우고 누군가는 자존감을 올린다.


오래 지나 생각해보니 '커피 타기'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내 태도와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내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지나고 보니 '커피 타기'도 세련되게 해 버리고 말 수 있었다. 커피 타기가 누군가의 업무가 되는 것을 긍정하는 게 아니다. 그냥 그때의 내 태도에 아쉬움이 남는다.


시간이 흘러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집에서 독박 육아하는 날이면 달달한 믹스 생각이 절로 난다. 진한 아메리카노가 주지 못하는 정겨운 카페인이 믹스커피에는 담겨있다. 어떤 날은 3잔까지도 마시며 힘을 낸다. 나는 결국 그 직장에서 그토록 싫어하던 믹스커피를 배워 나왔다. 그리고 아이들은 한없이 귀엽지만 육아로 심신이 지치는 하루를 믹스로 위로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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