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패닉
5월부터 시작한 B2B 플랫폼 프로젝트였다. 8월 말 1차 개발 완료, 10월 말 2차 개발 완료. 일정은 타이트했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요구사항 정의, 기획, 화면 설계.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럭저럭 진행되고 있었다. 아니, 진행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7월이 왔다.
"이거... 제가 생각한 방향과 다릅니다"
1차 개발 완료를 한 달여 앞둔 시점. 고객사 대표가 처음으로 화면 설계를 확인했다.
그의 첫 마디였다.
"이거... 제가 생각한 방향과 다릅니다."
순간 회의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고객사의 이사와 실무자가 우리에게 전달한 내용. 그리고 고객사 대표가 생각한 내용. 이 둘이 달랐다.
사실 나는 혹시 몰라서 계속 메일을 보내왔다.
"확인 요청 사항에 대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현재 진행 상황은 여기까지입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고객사 대표 메일 주소도 CC에 넣어서. 근거를 남기기 위해서.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었을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고객사 담당 직원은 화면 설계를 단 한 번도 대표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다.
중요한 건, 프로젝트가 뒤집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회사 대표는 내게 말했다.
"이런 식의 요청은 손실이 되니까 받아들이면 안 돼."
맞는 말이다. 정말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고객사 대표가 직접 우리 대표에게 연락하자, 결국 수용했다.
- 구조 변경 후 재개발
- 추가 비용 청구 불가
- 회사가 고스란히 떠안은 손실
그날 밤, 나는 생각했다.
웹 에이전시, SI 업계에서 일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이런 상황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패턴은 거의 비슷하다:
1. 프로젝트 초기엔 요구사항이 명확하지 않다
2. 중간 산출물에 대한 확인이 늦어진다
3. 우리는 일정에 맞춰 계속 진행한다
4. 막바지에 "아, 이게 아닌데요"가 나온다
5. 재작업은 우리 몫이 된다
6. 추가 비용은 청구하지 못한다
이게 단순히 운이 나빴던 걸까?
아니면 업계의 구조적 문제일까?
이후,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 최종 의사결정권자가 누구인지 프로젝트 시작 전에 명확히 파악하기
- 주요 마일스톤마다 의사결정권자의 '서면 승인'을 받는 프로세스 정립하기
- CC 메일이 아니라 직접 확인 요청하기
- 확인이 지연될 때 프로젝트를 멈추기(일정이 정해져 있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할까?
메일을 보내도 확인하지 않는 고객사.
일정 때문에 계속 진행해야 하는 에이전시.
추가 비용 청구는 어려운 갑을 관계.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구조적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해 세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1. 나만 겪는 문제인가?
업계 종사자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대부분 유사한 경험이 있었다. "Scope Creep(범위 확장)"은 웹 에이전시의 숙명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2. 해결할 가치가 있는 문제인가?
한 건의 프로젝트가 뒤집어지면, 평균적으로 수천만 원에서 억 단위의 손실이 발생한다. 회사 입장에서는 수익성 악화, PM 입장에서는 야근과 번아웃, 개발팀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재작업이 이어진다.
3. 사람들이 돈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 문제인가?
만약 이 문제를 예방하거나, 발생 시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도구가 있다면? 그리고 그 도구가 프로젝트당 손실액의 10%만 절감해도 충분한 ROI가 나온다면?
답은 '예스'였다.
그날의 패닉은 나에게 두 가지를 남겼다.
하나는 상처다. PM으로서 프로젝트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다른 하나는 기회다. 업계 공통의 문제를 발견했고, 이를 해결할 솔루션의 필요성을 확인했다는 것.
지금 나는 '범위 관리'를 체계화할 수 있는 도구를 구상하고 있다.
이름은 Scope Manager.
프로젝트 초기부터 범위를 명확히 정의하고, 변경 사항을 추적하며, 추가 비용을 자동으로 산정하는 시스템. AI를 활용해 리스크를 사전에 감지하고, 의사결정권자의 승인을 자동으로 요청하는 기능까지.
아직 구상 단계지만, 분명한 건 이 문제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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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젝트 중후반에 방향이 바뀐 적
- 추가 작업을 했지만 비용 청구하지 못한 경험
- "이건 원래 범위가 아닌데..." 했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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