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워킹홀리데이
어느 날은 뜬금없이 한국인 직원이 왔다. 놀란 토끼눈을 하고 인사를 했더니 오늘부터 일한다고 한다. 도대체 그녀는 어디서 어떻게 왔을까. 나처럼 다른 지점에서 막간 농축 트레이닝을 받고 온 것인가.
백조처럼 우아한 그녀의 자태. 까만 생머리에 흰 피부 그리고 땡그란 까만 눈동자까지 백설공주 같은 비주얼을 지녔다.
내 시선이 자연스레 매니저에게로 갔고 이윽고 입을 연다.
“경혜, 같은 한국인이니 잘 알려줘.”
“오늘부터 일하는 거야? 뭐부터 알려주면 돼?”
“레시피대로 커피 만드는 법을 알려줘.”
누구를 가르치는 것은 생애 처음이다. 수능치고 친구들과 고깃집 아르바이트할 때는 서로 도우며 일했고, 그 이후로도 마트에서 홀로 한 브랜드를 맡아 판매했기 때문에 타인에게 업무를 알려준 적은 없었다.
무언가 모를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녀가 일을 잘해서 내 자리를 뺏어가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든다. 불안감에 못된 마음이 생겨도 이내 그녀에게 100%를 알려준다.
매니저는 보통 각국의 2명씩 붙여서 일을 시킨다. 한국인은 오직 나뿐이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합심해 일할 때 시너지가 컸나 보다. 왜냐하면 항상 출근하면 이탈리아 2명, 폴란드 2명 그룹들과 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친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일적으로는 최상의 근무 환경을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나 역시 그녀와 비교당할까 봐 무서웠다. 내적 갈등이 엄청났다. 내 평판이 그녀의 칭찬으로 덮일까 봐 두려웠다. 그것도 뼈 빠지게 노력해서 얻은 결과인데 한국어로 알려주면 너무 쉽지 않은가. 불공평하단 생각이 들었다. 10분도 채 되는 시간에 이런 생각을 했다. 손님에게 내놓을 커피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를 만큼 마음이 콩밭에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몇 십 잔의 커피를 만들어보고는 크게 한숨을 쉰다.
“경혜야. 너 진짜 대단한 것 같아.”
“네?”
“이거 보통 일이 아닌데? 어려워서 못할 것 같아.”
“네? 그만두겠단 말씀이세요?”
나보다 2살 많았던 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하루를 겨우 버티고 그만뒀다. 허탈했다. 그녀가 속도를 맞추지 못했고 딱 3시간을 채우고 그 자리를 떴다.
한국어로 와장창 수다를 떨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된 것이다.
또 어느 날은 콜롬비아 직원을 데려왔다. 내가 일한 지 4개월째쯤 되던 날인데, 매니저가 그때와 똑같은 업무를 지시한다. 한국인과는 달리 냉소적인 분위기가 풍기던 갈색머리칼의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웃으며 인사를 건넸는데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미소? 영국인 막스가 말을 걸면 소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기분이 이상했지만 차분히 할 일을 했다.
‘매니저는 또 신입을 데려왔네. 무슨 생각인 거지?’
한국인이 아니라서 내가 알려줄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의심은 확신으로 돌아온다지. 매니저가 나를 보며 말한다. 그녀에게 업무를 알려주라고. 좀 더 협조적이면 좋으련만! 열성을 다해 알려주는데 대충 대답하는 모양새가 영 못마땅했다. 너무 그리운 한국인! 그래도 최선을 다해 매뉴얼을 알려준다.
묵묵히 매니저가 지시한 것을 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르치면서도 내 말을 듣는 건지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별다른 반응이 없는 그녀를 마냥 나무랄 수도 없었다. 하도 개념 없는 외국인들을 봐서 그럴려니 하고 넘겼다.
그렇게 혼자 떠들어대다 갑자기 매니저가 호출한다.
“경혜, 저번에 시음행사한 거 기억하지? 신메뉴인 토피넛라테 그란데사이즈로 하나 만들어봐.”
“정말? 너무 오랜만인데.“
매니저가 특훈을 지시한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점 내 프로모션을 진행하리란 것을. 마트에서 시음행사할 때 쓰던 소주컵사이즈의 종이컵을 꺼내온다. 나는 오랜만에 프로모션을 진행하는 것이라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새로 나온 토피넛 라테예요~ 무료이니 드셔보세요!“
”이게 뭐예요?“
”토피넛 라테예요! 이 컵을 갖고 매장을 방문하면 25p 할인해 줘요.”
“오 진짜야? 고마워!”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늘 하던 일이고 적성에 맞았기 때문에 미소가 끊이지 않는 나다. 답답한 매장보다 바깥에서 샤우팅 하는 일이 오히려 나았다.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간섭이 없는 유토피아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열정에 응답한다는 듯 자연스레 매장 안으로 들어간다.
스타벅스에서 정식으로 일하기 위한 관문이라고 보면 된다. 매장의 일원이 되면 활발한 영업활동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매장 운영에 어려움이 생기면 매장은 망할 것이고 지역 매니저가 우리 매니저를 호출할 것이다. 그런 꼴은 용납 못한다. 지역 매니저가 ‘알레’를 불러 소리친적이 많았기 때문에 내 자리에서 맡은 바 최선을 다했다. 아마 매출 하락과 고객 서비스에 대한 호통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나는 오래간만에 샤우팅을 하고 싱글벙글했다. 마트 아르바이트의 연장선이었고 늘 영국인들의 반응이 재밌어서 시키지 않아도 그 일을 하곤 했다. 어느덧 신나게 일하는 내 옆에 전봇대처럼 서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사실은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을 내가 대신한 꼴인데, 참으로 가마니가 따로 없었다.
몸소 시범을 보이고 그녀에게 권했지만 그녀는 응답하지 않았다. 마치 ‘난 이런 일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매장으로 들어와 정리했다. 갑자기 매니저가 나를 쏘아본다.
“알레, 다행히 손님들 많이 들어왔네!”
“경혜, 너만 일하고 신입은 아무것도 안 했어.”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짧은 휴게시간을 가졌고, 그녀에게는 해방이 주어졌다. 그런 태도와 마음가짐으로는 함께 일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