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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 Nov 08. 2019

저 새끼는 왜 지랄이야

'부모가 되어봐야 부모 맘을 안다'는 말을 굉장히 싫어한다. 자녀를 향한 과도한 집착이나 폭력, 부모로서 미숙한 태도 등을 정당화하는 말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너도 부모가 되면 그런 끔찍한 행동들을 할 거다'라는 저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런데 생각해보니 맘을 그냥 알게 된다는 거지 그 맘이 옳다거나 정당하다거나 하는 말은 없네?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차용을 해본다. 선생이 돼보니 선생 맘을 알긴 알겠다.


중, 고등학생 시절 도통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수업시간에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하면 눈에 불을 켜고 잔소리를 해대는 선생님이었다. 물론 별 말없이 보내주던 분들도 있었지만 개중 깐깐하다 싶은 선생님들은 '쉬는 시간에는 뭘 했느냐'라거나 '바지에 싸면 보내준다'라는 말들을 하며 쉽사리 화장실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사람이 갑자기 배가 아파질 수도 있고 예상치 못했던 요의를 느낄 수도 있는 거지 왜 저렇게까지 까탈스럽게 굴어야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저 새끼는 왜 지랄이야.'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선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이 지랄하는 새끼가 된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학교라는 곳은 아이들의 두뇌에 뭔가 집어넣는 것 이상의 책임이 있는 곳이다. 학업뿐 아니라 학생들의 행실이나 태도도 바르게 유지해야 하고 혹여나 일어날 수 있는 사고에도 대비해야 한다. 그렇기에 만약에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빠져나가 무언가 비행을 저지른다거나 사고가 발생하면 골치가 아파진다. 그리고 백해무익한 포털 댓글을 좀 읽다 보면 그런 일을 다루는 기사에 대한 여론이 학교와 교사에 얼마나 적대적인지 알 수 있다.


믿음만으로 다 되면야 바랄 게 없겠지만 가끔 담배를 피러 갔는데 수업시간에 빠져나와 담뱃불을 붙이고 있는 학생들과 매우 어색하게 마주치고는 하는 경험을 하다 보면 학생들의 개별 행동을 자연스레 경계하게 된다. 그리고 그 녀석들이 걸렸을 당시에는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지은 것 같이 참회하는 모습을 보이다 선생님이 사라지자마자 낄낄대는 모습을 보게 되면 인류애나 학생의 순수함에 대한 순진한 믿음 같은 건 조금씩 부스러져 나가기 마련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그 때 별로 안 순수했다.


거기에다 관리자들은 화장실 보내주기 싫어하는 선생님들보다 더 호들갑을 떤다. 포털 댓글이 저러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학생들이 한순간이라도 통제되지 않는 것 같다 싶으면 쉘 쇼크에 시달리는 군인처럼 우왕좌왕하며 교사들에게 하중을 가한다. 그리고 교사는 수업이나 학생들을 돌보는 것 말고도 배정받은 부서에 따라 각자 해야 하는 업무가 있다. 그 와중에 무슨 교육이다 뭐다 하면서 불러대고 애들은 물먹게 컵 좀 달라고 자꾸 교무실에 노크도 않고 들어오는 환경에 좀 시달리다 보면 사람이 좀 까칠해지는 것이다.


물론 어느 학생의 말마따나 내가 하는 지랄에는 환경보다 나의 '지랄 맞은'성격 탓이 더 크다. 학교에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내가 이 일에 상당히 적합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방해받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나는 쉬는 시간에 쓸 데 없이 찾아와서 쓸 데 없는 말을 늘어놓고 교무실을 사랑방처럼 쓰는 아이들을 잘 못 견딘다. 고등학생으로선 습득하기 힘든 개인의 거리에 대한 존중이라거나 하는 걸 기대하는 게 잘못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미숙함에 짜증이 나는 걸 어쩌지 못하겠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에게 나는 농담을 곧잘 받아주다가도 선을 넘는다 싶으면 곧장 정색하는 이상하게 까칠한 놈이 되었다. '애들이 그렇지 뭐' 할 수 있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어른인데.

  



언젠가 영화 교육에 관한 책을 보다가 성인들을 대상으로 악역을 창조해내는 수업을 진행하면 80%는 학창 시절 자신에게 나쁜 기억을 남긴 교사를 쓴다는 통계를 보았다. 물론 정말 이상하고 자질이 부족하며 부도덕한 교사도 많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비정상적으로 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한국에서 사회의 나머지 부분이 함께 짊어져야 할 양육의 책임을 학교에 다 떠넘겨 버리고 손을 놓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러면 나처럼 속이 좁쌀만 하고 역량이 부족한 사람은 악역의 모델로 누군가의 시나리오에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겠지. 뭐 그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이왕 등장하게 된다면 좀 잘 쓴 시나리오였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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