뻥하고 공을 차고 싶은 마음 내려놓기
축구 시합을 하다가 엄지발가락에 금이 가고 3주가 지났다. 왼쪽 발에 많은 힘을 기대며 오른쪽 엄지발가락을 들고 뒤꿈치로 걸어 다녔다. 뼈는 잘 유지만 되고 있었고(조금씩이라도 뼈가 붙어야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엑스레이상으로는 뼈의 상태가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 일이 없는 정상인 상태가 얼마나 그립던지. 다치고 나서야 알았다. 무탈이 얼마나 소중한지. 공을 찰 수 있고, 경기를 뛸 수 있는, 별일 없는 상태를 나는 원했다.
배가 안전하게 똑바로 나아가기 위해 싣는 배의 바닥짐처럼 누구나 항시 어느 정도의 걱정이나 고통, 고난이 필요하다.
_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앞으로 공을 찰 날이 많이 남은 앞날을 위한 가르침이었다. 내가 비록 함께 훈련하고 뛰지 못하더라도 내 동료들을 위해서 축구장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이 날은 공간 전술훈련이었다. 보통 축구장 안으로 들어가서 감독님의 지시사항을 듣는다. 안에 있을 때는 내 머리가 나빠서 감독님이 말하는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자책했었다. 생각 없이 뛰다가 감독님께 지적받기를 반복하기 때문이었다. 혼날까 봐 창피하기도 했고 다른 회원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해서 미안하기도 했다. 또 지적받은 내용을 잘하려다 보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부상자는 축구장 안에서 함께 뛸 수 없었다. 긴장감이 없이 밖에서 보고 있노라니 감독님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공을 차지 못하자 여유가 생긴 것이다. 어차피 차지 못한다는 마음의 내려놓음이었다. 여유는 실력이 있어서 가질 수 있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걱정과 두려운 마음을 내려놓음에서 오는 안정이었다.
감독님은 한 명 한 명에게 실수한 부분에 대해서 다시 알려주신다. 내가 안에 있었다면 속상했을 텐데(잔소리와 지적으로 여겨져) 밖에서 바라보니 감독님이 하는 지적은 향상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오는 특혜였다.
우리의 삶은 현미경으로 봐야 할 정도로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한데, 우리는 그 점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개의 강력한 렌즈로 확대해 엄청나게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시간이란 그것의 지속에 의해 사물과 우리 자신의 극히 공허한 존재가 실재한다는 허상을 주기 위한 우리의 머릿속에 든 하나의 장치다.
_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그 상황에서는 지적당한 부분이 작은 점인데 현미경으로 확대해 엄청난 잘못처럼 착각하고 있었다. 지적해 봤자 고쳐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충고하지 않는다. 조금만 말해도 고쳐질 것 같은 사람에게 고치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지적은 사랑이었다.
“다치고 나서 다 나을 즈음이 제일 무서운 거야. 가장 조심해야 할 시기야.” 축구장에서 들은 말이다. 맞다. 오늘도 공을 차고 싶었다. 차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두 번 찼는데 통증이 밀려왔다. 더 조심해야 할 시기, 바로 지금이다. 공을 차고 싶은 마음을 좀 더 참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