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했는데, 왜 내 탓만 했을까

자책은 때로 통제감이다

by 꾸더칸

분명히 잘못한 건 내가 아니었다.

상황을 아무리 다시 돌려봐도 그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 어딘가에서 자꾸 이런 생각이 올라왔다. '내가 뭔가 잘못했으니까 이런 일이 생긴 거 아닐까.' '내가 좀 더 조심했어야 했던 거 아닐까.' 억울함과 자책이 동시에 존재했다. 둘은 모순처럼 느껴지는데, 어쩐지 함께 있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누군가에게 털어놓았다. 그런데 돌아온 말이 위로가 아니었다. "그래도 네가 조심했어야지." "그러니까 네가 뭔가 잘못했던 거잖아." 그 말 이후로 억울함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정확히는, 더 깊숙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책이 남았다. 단단하게.

이 글은 그 자책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억울함은 어디로 가는가 — 감정의 행선지

인간은 감정을 경험하면 그것을 어딘가로 내보내야 한다. 울거나, 말하거나, 쓰거나, 행동으로 표현하거나. 감정은 흐름이 있다. 나왔다가 나가야 한다.

그런데 억울함이라는 감정에는 특이한 조건이 붙는다. 억울함은 상대가 있는 감정이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는데 부당하게 대우받았다는 인식. 그래서 억울함은 자연스럽게 바깥을 향한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외침이다.


그런데 그 외침을 받아줄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말했는데 "네 탓"이라는 대답이 돌아오면 어떻게 될까. 억울함은 갈 곳을 잃는다. 바깥으로 향하던 에너지가 방향을 잃고, 결국 안으로 돌아온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감정의 내면화(internalization)라고 한다. 외부를 향해야 할 감정이 내부로 흡수되는 과정. 이 과정이 반복되면, 사람은 부당한 일을 당해도 외부에서 원인을 찾지 않게 된다. 처음부터 자기 안에서 원인을 찾는다. 그것이 훨씬 안전하기 때문이다.


"내 탓이오" — 언어가 감정에 새기는 것

어릴 때부터 특정한 언어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이 있다.

모든 잘못은 자신에게 있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받은 사람. 나쁜 일이 생기면 '내가 부족해서', '내가 죄인이어서', '내가 더 조심했어야 해서'라는 언어로 해석하도록 훈련된 사람.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면 억울한 일이 생겼을 때 자연스러운 반응이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저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데서 억울함이 시작된다. 그런데 '모든 것은 내 탓'이라는 언어가 깊이 새겨진 사람은, 같은 상황에서 먼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이 언어가 피해 상황에서도 작동하기 때문이다. 명백하게 상대가 잘못한 상황에서도, "그래도 내가 뭔가 잘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올라온다. 그리고 고해성사 같은 행위, 즉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위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생긴다. 다른 사람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줘도 그 말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래도 나도 잘못한 부분이 있어'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올라온다. 왜일까.


귀인의 방향이 바뀐다 — 하이더와 와이너의 이론

심리학자 프리츠 하이더(Fritz Heider)는 사람이 어떤 사건의 원인을 설명할 때 크게 두 방향으로 귀인(attribution)한다고 설명했다. 내부 귀인, 즉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것. 외부 귀인, 즉 원인을 상황이나 타인에게서 찾는 것.


버나드 와이너(Bernard Weiner)는 이것을 더 발전시켜, 내부 귀인이 습관화되면 실패와 부정적 사건을 반복적으로 자신의 탓으로 돌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중요한 건, 이 귀인의 방향이 어린 시절부터 주변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네 탓이야"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들으며 자란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먼저 자기 안에서 원인을 찾는 패턴이 굳어진다.


더 나아가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이 발견한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개념에서도 이 구조가 보인다. 반복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노출된 존재는, 결국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게 된다. 억울함을 표현했을 때 반복적으로 "네 탓"이라는 반응이 돌아온 사람은, 억울함을 말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말해봤자 내 탓이 될 것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스스로 먼저 자기 탓을 찾아낸다. 외부로 향하던 억울함보다 내부로 향하는 자책이 더 익숙하고 안전한 패턴이 되어버린다.


자책은 때로 통제감이다

자책에는 심리학적으로 흥미로운 기능이 하나 있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내 탓이다"라고 생각하면, 역설적으로 통제감이 생긴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다음에는 내가 잘하면 된다'는 논리. 반면 "저 사람의 잘못이다"라고 생각하면, 나는 무력해진다. 상대의 행동을 내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 시절, 보호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보호받지 못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이 패턴은 더욱 강하게 자리 잡는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다'라고 인식하면, 나를 보호해줬어야 할 사람들이 그러지 못했다는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 그 현실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차라리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이 심리적으로 덜 무너지는 선택이 된다.


이것이 자책의 역설이다. 자책은 자신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부서지지 않기 위한 방어 기제일 수 있다.


억울함을 되찾는다는 것

억울함을 삼키도록 훈련된 사람이 억울함을 다시 느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 한마디로 바뀌지 않는다. 오랫동안 새겨진 패턴은 이성의 언어로 쉽게 덮어지지 않는다. 머리로는 알아도 몸과 마음이 따라오지 않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다. 그 자책이 어디서 왔는지를 아는 것. 내가 원래부터 자책하는 사람이었던 게 아니라, 억울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환경 속에서 자책을 선택하도록 학습되었다는 것. 이 인식이 생기면, 자책을 조금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나의 본질이 아니라, 내가 살아남기 위해 익힌 방식이라는 것.


억울함이 자책으로 굳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되돌아오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과정의 문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론은 여기까지 설명해 준다. 귀인이 어떻게 내면화되는지, 학습된 무기력이 어떻게 억울함을 삼키게 만드는지, 자책이 어떤 심리적 기능을 하는지.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말하고 싶다.

억울함을 말했을 때 "네 탓이야"라는 대답이 돌아온 경험. 그것은 한 사람의 감정 처리 방식 전체를 바꿔버리는 사건이다. 그 말 한마디가 아니라, 그 말이 반복되는 환경이 문제다. 그리고 그 환경은 종종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들어진다. 가족, 공동체, 또는 어릴 때부터 받아들인 세계관.


나는 오랫동안 자책을 '나쁜 습관' 정도로만 여기는 시선을 경계해왔다. 자책은 그냥 생긴 게 아니다. 억울함을 표현할 공간이 없었던 사람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찾아낸 방법이다. 그 맥락이 보이지 않은 채 "자책하지 마"라고 말하는 건 문을 잠근 채 "나와"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나는 자책이 심한 사람에게 먼저 이 질문을 하고 싶다. "당신이 억울했던 적이 있나요?" 그리고 "그때 당신의 억울함을 받아준 사람이 있었나요?"


억울함이 처음 삼켜진 그 장면.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자책의 뿌리를 건드리는 시작이다.

억울함은 나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자기 보호의 신호다. 그 신호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막힌 것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진짜 자책을 다루는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신의 억울함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받아줄 공간이 없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