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이, 순한 아이
제1화 첫 아이, 순한 아이
인트로
첫 아이 출생의 이야기, 그 감격을 말하려면 서론이 필요하다. 결혼 후 5년차에 태어난 첫 아이, 자의 반 타의 반 이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결혼 후 1년은 병상 부모님 돌보느라 시카고-보스턴 이산부부로 살았고, 그 후 향수병에 걸린 남편이 막 박사과정 시작한 아내를 두고 한국에 직장을 구하여 가는 바람에 미국-한국 이산부부로 살았다. 이산부부라고 2세가 미뤄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 부부는 생활이 안정되면 입양하자는 말을 종종 하던 터라 2세 계획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기도 했다.
그러다 결혼 3주년이 되었다.
그동안 병상의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빡빡하던 박사과정도 논문만 남겨둔 시점이었다. 2세를 생각하는 마음이 생겼다. 남편 역시 귀국 후 혼자 지내며 직장 동료 2세들의 깜찍한 인사를 받아온 터라 우리는 2세를 위해 기도하며 준비하자고 의기투합을 했다. 잠들기 전 둘이 손을 맞잡고 이제 아이 주시면 잘 키우겠노라고, 조물주의 작품을 위탁 받는 심정으로 기도했다.
당시 우리는 늦은 셈이었다. 남편은 30대 중반이었고 나도 30을 바라보는 나이. 건강한 아이를 위해 정성으로 준비하고 싶었다. 딱히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커피를 끊었고, 까무잡잡한 남편을 닮으면 안되겠다는 마음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유를 엄청 마셨다. 부모님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 그리움과 슬픔이 올라올 때면 그 분들로 인해 기쁘고 감사하였던 것들을 헤아리며 감정 마무리를 하였다.
그리고 몇 달 뒤 아기가 생겼다.
예정일 이틀인가 늦게 태어날 때까지 자궁 속에서 꼬물꼬물 자라는 태아를 품었던 임신기는 감히 말하건대 내 생애에서 제일 평안하고 감사하고 부담 없었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태아 때부터 순한 아이, 딱히 입덧이 없었다. 대신 그로 인한 부작용이 있었다. 임신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막힘없이 마구 먹다보니 출산 즈음에는 거의 20킬로의 체중증가. 첫 아이는 여아 평균, 3.2kg 이었건만.
출산
출산의 고통은 얼마나 클까. 가늠하기 어려웠다. 친정 어머니를 닮는다고들 하는데 이미 돌아가신 터니 여쭤볼 수도 없다. 미뤄둔 논문 준비하듯 임신 중에 출산과 육아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섭렵했건만 여전히 호기심과 두려움이 남았다.
여인네 출산의 고통은 어디서 온거야. 성경을 묵상하다가 하와 할머니가 들은 창조주의 멘트– 출산의 고통을 더하리니-에 눈이 갔다. 그리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죄로 인해 고통을 더한 것이라면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얻으면 고통이 덜하겠네. 누구에게 신학적 해석을 요청하거나 확인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렇게 믿고 용서를 구하고 이제 고통이 덜해지리라 소망했다.
출산의 조짐이 보인 것은 일요일 새벽녘이었다. 참을 만큼 아팠다. 그래도 여느 때처럼 교회에 갔고, 출산 앞두고 나는 그만 두었지만 부부가 함께 봉사했던 봉사부서에서 남편 끝날 때까지 기다렸고, 집에 와 점심을 챙기는데 도저히 참기가 어려웠다. 진통의 간격도 짧았다.
"병원가요, 때가 온 것 같아."
병원 도착한 것이 2시 무렵이었을까. 그런데 겨우 3센티 열렸단다. 10센티까지 열리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니 집에 갔다와야 하나 망설이는데 한적한 개인병원이고 출산 앞둔 급한 임산부도 없으니 병원에 있으란다. 그러기로 하여 남편을 보호자실에 두고 진통실에 가서 누웠다.
내가 읽은 책과 달랐다. 분명 3센티에서 분만 시점인 10센터까지 가려면 자궁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해야 하고, 그에 따라 통증이 심해졌다 놓여졌다 한다고 했는데.. 산통이 non-stop이었다. 통증은 엄청난데 정신은 점점 더 말짱해졌다.
'이건 뭐지? 왜 진통이 계속? 자궁에 이상이 있는 건가?'
자궁이상을 염려하다가 출산과정을 적은 책 저자의 전문성을 의심했다.
'그래, 모든 이론에는 예외가 있다더니 그 책이 예외를 언급하지 않은 거야.'
임신 내내 태아에게 말 걸었던 것처럼 태아에게도 물었다.
'성격이 급한 거니? 빨리 엄마가 보고 싶은 거야?'
그러다 산도를 지나야 할 태아의 스트레스를 위로해야 할 생각도 들었다.
'잘 견디렴. 좁은 길을 잘 견디면 새 세상이 펼쳐진단다'
물론 정확한 표현이야 기억나지 않지만 non-stop 진통 속에서 생각도 하고 태아에게 말 걸기도 하고 알 수 없는 감동으로 인해 눈물도 흘리고 그랬다. 2-3시간 지났을까. 진통을 잘 견디고 있는지 확인하러 왔던 간호사가 깜짝 놀란다.
"어머, 벌써 아기 머리가 보이네요."
속전속결일 뿐 자궁이상 아니니 안도하였다. 그리고 진통의 끝이 보이니 감사하였다.
분만실에서 태아가 나올 때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오후 4시 30분. 몸의 일부가 빠져나가는, 말 그대로 분신(分身). 그리고 그 분신과의 첫 눈맞춤을 잊을 수 없다. 첫 울음을 터뜨리기도 전의 눈맞춤. 책에서 본 분만 직후 신생아는 ‘응애’ 버전의 울음이건만 나의 첫 아이는 한쪽 눈을 뜨고 나를 확인하는 듯 했다. 물론 신생아 시력으로 알아보았을 리 없었겠지만. 그리곤 응애 울었다. 드라마에서 처럼 큰소리의 울음도 아니고 철들은 아이의 울음처럼 절제된 울음이었다. 그리곤 잘 씻겨지고 감싸져서 보호자실 남편에게 가는 것 같았다. 안도감, 감사함, 경외감, 신비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빠뜨릴 수 없는 분만 후기가 있다. 나중에 전해들은 보호자실 남편과 첫 아이와의 만남. 아직 분만하려면 멀었다는 이야기를 들고 아내를 진통실로 보냈던 남편은 보호자실에서 기다리다 잠이 들었단다. 아내가 non-stop의 진통을 했던 2-3시간 동안, 태아에게 말 걸며 진통을 함께 이겨내자고 각오를 다지는 동안, 아기 아빠는 평화롭게 잠을 자고 있었단다!!! 이 남편의 행태에 분개해야 했건만 당시에는 생명의 감동이 워낙 커서 뭐든 용서할 수 있었다.
어쨌든 자다가 일어난 남편이 시간을 보니 아직 저녁이 안된 시간. 본격적인 진통이 오면 저녁식사 해결이 어렵겠다는 생각에 저녁 먹으러 가려고 문고리를 잡는 순간, 간호사가 감싸 안은 신생아 딸아이를 데려왔단다.
"축하드려요, 따님이에요."
'앗, ET다.'
생전 처음 신생아를 본 36세 아빠. 태열로 벌긋 벌긋한 얼굴에주름있는 목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ET를 연상했단다. 이런.. 아빠의 첫 반응을 용서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라 첫 아이 한별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