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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랑관장 Jul 12. 2018

연애, 어디까지 해봤니?

목표 개수 채우 듯 닥치는 대로 사람을 만났던 때가 있었다. 어느 시점부터는 소개팅을 하는 족족 사귀게 되는 기이한 경험을 했는데, 그렇게 마구잡이로 시작한 연애의 끝은 늘 황당했다. 난 늘 차이는 쪽이었다. 그 시기의 절정에 한 사람을 만났다. 그의 외모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콧날은 절벽처럼 깍아내질렀고, 근육이 탄탄하게 잡힌 등 뒤에는 조폭 영화에서나 봄직한 대형 잉어 세 마리가 노닐고 있었다.


그는 동료의 소개로 만났다. 동료가 잘 가던 카페 사장의 절친인데, 훈훈하다고 했다. 지난 연애의 종지부를 찍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연락처를 받아 두고도 만남을 서두르지 않았다. 과거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차릴 때 쓰는 얕은 수법이다. 이윽고 그와 연락처를 교환한 지 두 달여 만에 만났다. 그 사이 두어 차례 통화를 했는데 그의 중저음에 왠지 모를 자신감이 느껴졌다. 자신감이 과하게 느껴지지 않아 만남에 앞서 약간의 호기심이 추가되었다.      


우린 지하철 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분명히 술이나 한잔 하자고 했는데, 차를 가지고 온대서 살짝 핀트가 어긋났다. 한참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공황장애가 심해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했다. 오 분 정도  기다렸을까. 저 멀리 비상 깜빡이를 킨 차가 나타났다. 저 차겠구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차는 점점 가까이 오는 가 싶더니 전화벨이 울린다. 그 차가 맞았다. 나는 그의 차로 접근했다. 선팅이 짙은 유리창 너머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았다. 쓱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색한지 운전대를 붙들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턱선과 콧날이 날렵한데, 뒤통수가 납작했다. 내 타입은 아니었지만, 수려했다. 그는 다짜고짜 쿠키와 드라이플라워를 내밀었다. 카페 사장인 친구가 준 거라고 했다. 하도 어색해서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도 웃기는지 입을 씰룩거렸다. 좋은 신호였다.      


우리는 와인바에 갔다. 와인 한 병을 다 시키기에는 부담스러워 잔 와인을 주문했다. 여차하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는 최근 와인에 입문했다고 했다. 어색함을 깨려 와인잔을 부딪히려 하자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와인은 잔이 아니라 눈빛을 부딪히는 거라고, 잔을 살짝 드는 시늉을 하더니 눈도장을 찍었다. 여지없이 웃음이 터졌고 웃다가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옆구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더 이상 그와 있는 시간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는 질문이 없는 사람이었고, 어쩌다 한번 그가 질문을 던지면 나는 대답을 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어떤 때는 내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특히 내가 하는 일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초점이 흐려졌다. 그는 GPS 사업을 한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는 렌터카에 GPS를 다는 일이라고 했다. 모든 직업의 세계를 알 수 없는 노릇이니, 자기 밥벌이는 하는 사람이구나 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새로운 와인바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와인 한 병을 시켰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어떤 공통사도 찾을 수 없었지만 쉴 새 없이 떠들고, 웃었다. 우리의 케미스트리는 큰 불로 번지기 직전이었다. 그 사람은 순수한 데가 있었다. 그의 눈웃음이 그랬고, 각 잡고 목소리를 내리까는 모습이 그랬고,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만들 줄 아는 솔직함이 그랬다. 사업을 하다 두 번 사기를 당해 여태 벌었던 돈이 다 털렸던 이야기 등,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순수함에 무한한 신뢰가 생겨 새벽 두 시 넘어서까지 술을 마셨다.


대리 기사를 불러 집까지 바래다주더니, 내 집 앞에서 대리기사를 보내더라. 헤어지기 아쉬우던 참에 쾌재를 불렀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편의점에 가더니 실론티를 사와 건네주었다. 그의 차 안에 평소 좋아해 마지않던 박정현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은 그는 실론티 중독자였다. 그 날 이후 난 정말 많은 실론티를 마셨다. 그 밤 이후 매일 그를 만났으므로.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사귀어보자 마음먹은 건 아니었다. 그는 늘 퇴근시간 즈음, 오늘 저녁에 ‘잠깐’ 볼 수 있느냐고 물었고, 우리는 드라이브를 하거나 집 앞 주차장에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늦은 밤이 되면 그는 늘 일을 하러 가야 한다고 길을 떠났다. 조금 이상한 직업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세상에 관심이 없었다. 하루는 낙성대 근처에 살고 있던 동생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데, 동생 학교가 어딘지 묻기에, 농담한답시고 낙성대 다닌다고 했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그건 어디에 있는 학교냐고 물었다. 그는 어떤 면에서 늘 괴리되어 있었다. 이 세상, 아니 내가 사는 세상 사람 같지 않달까? 나는 그가 싫지 않았다.


그는 어느 날 저녁 장문의 문자를 보내와, 자기와 사귀어 보지 않겠느냐며 내 의사를 물어왔다. 문자가 조금 뜬금없다 느꼈다. 내 연애는 이미 진행형이었으므로. 그렇게 우리는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그를 알면 알 수록 충격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여러 의미에서 나는 신세계를 맛보았다.  


그는 삼 남매의 막내로, 위로 누나 둘이 있었는데, 첫째 누나는 결혼해서 안정적으로 사는 듯했고, 둘째 누나는  결혼해서 불안정적으로 사는 듯했다. 둘째 누나는 한눈에 봐도 엄청난 미인이었는데, 학창 시절 동네에서 기가 세고 싸움 잘하기로 유명했다고 했다. 자연스레 누나는 동네 깡패 형들과도 잘 어울렸는데, 그 덕분에 그는 학창 시절 그 어느 누구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 만난 형들은 그가 가진 자원이었고, 네트워크였다. 그이의 양친은 젊은 날 무작정 시골서 상경해 노상에서 청과물 장사를 하면서 삼 남매를 키웠다고 했다. 찢어지게 가난해도 부부는 서로에게 다정했다. 누나들과 터울이 적지 않았던 탓에 늘 혼자 놀기 일쑤였고, 어린 시절의 기억은 늘 외로움으로 점철되어 있는 듯했다. 그는 셈이 빠른 큰 누나보다는 없어도 화끈한 작은 누나에게 각별했는데, 거의 매일 같이 통화를 하며 그 둘은 낄낄거렸다. 그는 양친에게도 살갑고 착한 자식이었다. 대형 마트에서 일하는 청소 노동자였던 그의 모친을 하루도 빠짐없이 모시러 갔다. 어릴 때 모친 속을 썩인 걸 갚는 마음이라고 했다. 그의 모친은 없는 살림에도 누군가에 아쉬운 소리를 하거나, 신세 지는 것을 끔찍이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 모습을 그가 쏙 빼닮았었다.


뻔질거리는 외모만 보고 있으면 어디 부우잣집 잘 자란 도련님 같은데, 어림없는 소리였다. 가난은 그의 꿈을 번번이 가로막았다. 외모만큼이나 그의 운전실력도 화려했는데, 알고 보니 카레이서를 꿈꾼 시기가 있었다. 그의 운전 실력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 덕분에 늦은 밤 인천공항가는 고속도로에서는 가끔 내기 경주가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행히도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그의 부모는 밑천만 수억이 드는 막둥이의 취미생활을 뒷바라지할 능력이 없었다.


고교시절 밴드부의 경험은 그를 어느 대학 실용음악과로 인도했다. 그 마저도 학교에서 벌어진 큰 싸움에 휘말려 중퇴하고 말았다고 했다. 그는 뭐든 쉽게 시작했고, 일이 꼬인다 싶으면 ‘에이씨 더러워서 못해먹겠다’는 식이었다. 수가 틀리면 앞뒤 재지 않는 성미가 그의 삶의 불안한 요소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계산 없음이 순수하게 느껴졌다.


이후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물 불을 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떤 측면에서 지극히 여리고 순진해, 사람을 잘 따르는 탓에 온갖 ‘불법’적이고 위험한 일에도 손을 댔다. 자칫하면 감방에 갈 수 있는 일 말이다. 천지 분간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불법 도박 사이트에도 연루되었고, 그 덕분에 엄청나게 큰돈을 만질 수 있었다고 했다. 좋은 날도 잠시, 믿고 따르던 형에게 배신을 당해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했다. 그 사건 이후 그는 잠도 자지 않고 그 자를 잡겠다고 사방팔방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했다. 수십억, 아니 수백억을 가진 사람 뒤를 빈털터리가 쫓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녔을 터였다. 그는 다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당연히 버젓한 일이 아니었다. 단란 주점이나 나이트클럽에서 기강을 잡고 소위 ‘업소 아가씨’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기도 하고, 호스트 바에서 돈을 벌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는 듣는 것은 당혹스러웠지만, 그가 말하는 걸 받아 쓸 만큼 그의 인생 스토리는 흥미로웠다. 적어도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GPS 사업으로 성실하게 돈을 모으며 곧 작은 이자까야를 개업해 살겠다는 소박한 꿈이 있는 사람이었다. 평소 요리를 업으로 하는 사람과 사귀고 싶었는데, 나는 마치 꿈의 실현을 목전에 둔 사람 마냥 그의 포부를 부추기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렸다. 입버릇처럼 더 이상 긴장 속에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가 왜 긴장 속에 사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에게는 많은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늘 상대방을 사장님이라고 불렀고, 통화를 할 때는 여지없이 굵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 모습이 하도 어설퍼 늘 그를 따라 하면서 박장대소를 했다. 여전히 그는 간간히 늦은 밤 일을 하러 떠났다. 가끔 형사와도 통화를 했다. 그의 살아온 궤적을 보자니 친한 형사 하나쯤 있는 건 놀라울 일이 아니었다. 극과 극이 통하는 것처럼, 그의 인적 자원은 깡패 아니면 경찰이었다.   


그와 나누는 대화의 주제가 극히 제한적이었지만 신기하게도 같이 있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와 많은 것을 공유하고 싶었다. 마치 그에게 나를 이식하기라도 하듯이. 그 역시 내가 관심을 가지는 정치 사회 분야에 관심을 가지려고 애썼다. 그를 앉혀놓고 영어를 가르치기도 하고 (물론 얼마 안가 끝이 났다) 재미있고 대중적으로 인기를 끈 소설은 같이 읽기도 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함께 읽은 소설은 딱 두 권인데, 한 권은 천명관 작가의 <고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유정 작가의 장편소설 <7년의 밤>이었다.


그가 <7년의 밤>에 나오는 서포터즈와 같은 일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일종의 심부름센터 같은 일이다. 렌터카에 GPS를 장착하는 일이라는 게 어떤 일인지, 왜 밤에만 일하는지, 왜 늘 긴장 속에 사는지, 통화하는 사장님이 누구인지, 왜 형사와 통화하는지 등 의구심이 일었지만 한 번도 적극적으로 알려고 들지 않았던 궁금증이 단숨에 해소되었다.


나는 내심 놀라고 당혹스러웠다. 한편 그가 그렇게 살고 있는 건 하등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삶의 노선이 그렇게 정해진 데는 자신의 의지도 한몫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놓인 삶의 조건은 분명 그의 선택에 큰 몫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관계는 계속되었다. 나는 어느 시점에는 그가 스스로를 서포터즈라고 희화화 할 때 진심으로 웃음이 나왔다.


그의 고객들은 주로 간통죄에 기대어 배우자의 외도 사실을 잡는 일을 의뢰하는 사람들이었다. 가끔은 아주 위험한 전화를 받기도 했는데, 짐작하건대, 누군가를 제거해달라는 요청 같은 것이었을 것 같다. 그는 다행히도 바람난 현장을 찾는 일에만 천착했다. 그는 사랑에 의리를 따지는 사람이었고,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를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간통죄는 생계와 직결되는 법이기도 했지만, 없어지면 안 되는 지극히 인간 세계 질서유지에 필요한 법이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 못내 불만이었다. 한국에서는 불법으로 취급되지만, 외국에서는 사설탐정이라는 어엿한 직업이라고 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불륜 현장을 잡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사설탐정의 조력이 필요했다. 경찰은 바람난 현장을 잡으러 다니는 수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서포터즈인 셈이었다.


2015년 어느 날 헌법재판소는 간통죄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간통죄가 폐지된 것이다. 지지부진 수년간 논쟁적이었던 그 몹쓸 법이 폐지된 것이다. 그의 생계는 즉시 위협받았다. 더 이상 긴장 속에 살고 싶지 않다던 그의 입버릇 같았던 염원은 강제로 이뤄질 판이었다. 이 세계의 법과 제도가 얼마나 많은 산업을 몰락 혹은 양산시키는지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어찌 된 셈인지 이자까야를 개업하는 일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대신 그는 부동산에 취직했다고 했다. 화이트 칼라 노동자가 되는 것이 그의 오랜 꿈이었다고 말했다. 화이트 컬러란 문자 그대로 화이트 칼라 셔츠를 입고 사무실로 출근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결심은 늘 그랬듯 순식간에 이뤄졌다. 우리가 만나 사귄 지 일 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태생적으로 화이트 칼라 노동자였던 것처럼 화이트 셔츠가 잘 어울렸다.


취직을 한 그로부터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온전히 하루를 거르는 일도 있었고 이틀 사흘을 건너뛰는 불상사도 있었다. 이에 질세라 나도 연락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곧 그의 생일이 다가오는데, 고민스러웠다. 생일 선물을 샀고, 어찌어찌 당일 저녁 그를 만났다. 그는 새로 시작한 일에 빠져 있었다. 일을 배우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자신이 사무실에서 얼마나 인정을 받고 있는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동안 서운했던 마음도 잠시, 안심이 되었다. 그동안 너무 속좁게 굴었나 싶어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를 응원하고 돌아서며, 설마 그날이 그를 보는 마지막 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주일 뒤면 내 생일이었다. 그는 그날 이후 연락이 없었다. 뿔따구가 난 나머지 연락이 올 때까지 연락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끝내 연락은 없었다.  


내 집에는 그의 몇 가지 물건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노트북같이 값나가는 물건도 있었다. 그것이 볼모였다. 언젠가는 연락이 오리라. 아니나 다를까. 두 달여 만에 문자가 왔다. 부동산 일을 하다가 라이벌 부동산 업자와 시비가 붙었는데 몸싸움으로 번저 일이 복잡해졌다는 것이었다. 구치소 신세를 졌고, 그날 이후로 내게 연락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순간 가슴이 후두둑 뛰었지만 믿거나 말거나였다. 나는 출근할 때 물건을 현관문 밖에 내놓겠노라 싸늘하게 말했다. 귀가해 보니 내놓은 물건은 없었다. 가슴이 뻥 뚫려버린 듯했다. 메모라도 남겨두지.


얼마지 않아 해는 바뀌었다. 이제 그만 미련을 떨어야지 싶어, 긴긴 문자를 그에게 보냈다. 그가 원망스러웠지만,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보니 웃음이 났다. 그가 황당하게 떠나기 직전까지 그는 내게 생기를 주었고, 아낌없이 시간을 내어준 사람이었다.


연애 끄트머리에 그가 곱셈과 나눗셈을 하지 못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는 모른척했다. 그 사실은 그에 대한 다른 어떤 사실보다 충격적이었다. 영어를 가르쳐주겠다고 그이를 앉혀는 둘 수 있어도, 셈하는 법까지 알려줄 자신이 없었다. 그 사실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당장 이자까야 사장을 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 되었지만, 이내 우리에겐 문명의 이기, 계산기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에게 보내는 내 문자는 오지랖의 향연이었다. 나는 그에게 간곡히 당부했다. 솔깃하는 말도 한번은 걸러듣고, 스스로 위험한 일에 뛰어들지 말며, 몸이 고될 지언정 마음 편한 일을 하라고. 깊은 애정이 아닐 수 없었다. 이별 과정에서 처음으로 눈물이 났다. 다시 오지 않을 지난날이 허망했고 즐거웠으므로. 오늘을 기점으로 연락하는 일이 없을 거라는 단호한 말을 끝으로 눈물을 거두었다. 답문자는 기대하지 않았다. 속이 후련했다.


다음 날이 밝았다. 마침 본가에 내려와 부친과 영화를 보러 가던 참이었다. 상영관 앞에서 그로부터 문자가 날아들었다. 주변의 모든 소리가 음소거되는 듯했다. 문자는 나에 대한 고마움과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비통함으로 넘쳐났다. 그는 나에게 멋진 사람이자 멋진 여자라고 치켜세웠다. 그의 근황은 드라마틱했다. 거제도에 있는 조선소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여태 해 본 일 중 가장 힘든 일이지만, 보람차다고 했다. 나는 그제야 뜨거운 눈물까지는 아니지만, 감흥이 일었다. 단호하게 다시 연락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해놓고 나는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답문자를 보냈다. 문자 줘서 고맙다는 점잖은 인사와 함께 하루하루 충실히 살다 보면 좋은 날 오지 않겠냐고 격려했다. 그는 읽씹으로 우리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지나고 보니, 모르겠다. 그가 진짜 시비에 휘말려 구치소 신세를 졌는지, 그리하여 불가피하게 연애를 종료해야 했는지, 실제로 조선소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이제와 보니 모르겠다. 내가 얼마나 그 관계에 진지했는지. 나는 그와 헤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애는 하면 할수록 좋은 사람을 만난다더니 나는 그 이후 '나에게' 더 좋은 사람을 만났다.


가끔 그를 생각한다. 그의 주변에는 믿을 만한 친구가 없었다. 사회적 관계망이 그토록 헐거울 수 있다는 사실은 이 한 세상 살아가는데 취약점이었다. 그가 믿을 건 오로지 가족뿐이었는데, 그 가족마저도 그가 얼마나 위태롭게 삶을 꾸리는지는 안중에 없었다. 그들은 그가 한탕 벌이를 해올 날 만을 기다리는 둥지의 어린 새들 같아 보였다.


그리고 가끔 생각한다. 길에서 그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떨까? 반갑게 다가갈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는 왠지 나를 볼 면목이 없어 피할 거 같다. 나는 조금 서운할 거 같다. 이해할 수 있다. 그보다 더 한 것도 이해했으니 말이다. 부디 잘 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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