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 고성에서 부산까지 770km 해파랑길을 걷다
고등학교 세계지리 수업을 할 때 '교통, 통신의 발달과 세계화' 단원을 가장 먼저 가르친다. 지리교사인 나는 이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9년 전 춘천에서 여수까지 걸어갔던 도보여행 썰이다.
2012년 5월, 스스로 창업한 회사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뒀었다. 29살 아직 젊은 나이였지만 당시에는 참 막막했고, 무언가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강했다. 강남역 5번 출구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인수인계를 끝마치고 짐을 챙기고 나오는데 인터넷으로 한 기사를 봤다. 제목은 요즘 뜨고 있는 노래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저 노래를 여수 밤바다를 직접 보면서 들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마침 이제 백수도 됐고 시간도 많으니까 걸어서 가보면 어떨까?' 하는 살짝 미친 생각도 들었다. 출발지는 20대를 거의 온전히 보냈던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 '춘천'
생각이 든 순간 바로 실천에 옮겼다. 아무리 강력한 결심도 며칠만 지나면 서서히 녹슬어 버리니까. 2호선을 타고 바로 강변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고 버스표를 끊으며 동시 춘천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연락했다. 그 친구와 밤새 술을 마셨고, 새벽에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다. 여행의 이름은 지금 이 순간은 지금 단 한번뿐이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어서 '내 생애 단 한번'이라고 지었다.
타오르는 태양과 햇빛 알레르기, 쏟아지는 폭우와 관절염 등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21일 만에 무사히 전라남도 여수에 도착했다. 걷는 동안 무수히 많은 식당과 카페, 편의점, 치킨집을 갔는데 다행히 단 한 번도 '여수 밤바다'를 듣지 못했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를 여수 밤바다를 보면서 들을 수 있었다.
거창한 목표였일 수도 있고 별 시답지 않은 목표일 수도 있는 '춘천에서 여수까지 걸어가서 여수 밤바다 듣기'를 달성한 후에 잠시 현타가 오기도 했다. 20일 간 너무도 뚜렷하고 강렬한 목표를 갖고 있었는데 정작 목표를 달성하고 나니까 역설적으로 목표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 꽤나 컸다.
하지만 20대 마지막의 도보여행을 통해 걷는 순간순간 그 자체가 얼마나 짜릿하게 행복한지 온 몸으로 경험할 수 있었고, 나름대로 뚜렷했다고 생각했던 인생의 목적이 마구 흔들리던 20대 후반에 '목표가 뚜렷하다면 그 중간중간에 발생하는 문제는 그냥 풀면 된다'는 너무도 당연하지만 명확한 진리를 얻을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건 이렇게 800km를 걷는 동안의 기록이 영상으로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수업 시간에 썰을 풀 때도 당시의 느낌과 기운을 최대한 생생하게 늘어놓긴 하지만 아무래도 사진 몇 장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퇴색되어만가는 기억으로만 그 뜨거웠던 걷기의 경험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내 생애 단 한번'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2012년 여름의 기억이 말 그대로 기억 속에만 남아있기는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수업 중 썰로 구전되어 내려오던 이야기를 글로 남기기로 했다. (브런치 여행이 부르는 노래 중, 할 수 있을 텐데가 아니라 지금 당장!)
하지만 글도 뭔가 성에 차지 않았다. 공중에 떠다니는 말을 손에 잡히는 글로 변환하는 작업은 분명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있었고, 디테일한 묘사에서는 썰보다 나은 점이 있었지만, 생동감 측면에서는 오히려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9년 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영상을 찍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다시 떠나기로 했다.
사실 9년 전 강원도에서 출발해서 경기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까지 걸으면서 경상북도와 경상남도만 빼놓고 걸은 것이 내심 아쉬웠었다. 그래서 도보여행을 끝마친 후 작성한 후기글에서 조만간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 고성에서 부산까지 걷는다는 다짐을 했었다.
그리고 나는 서른이 되었고, 결혼을 했고, 지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변화들에 적응할 틈도 없이 시간을 흘러갔고, 9년 전의 약속은 분명히 내 마음속에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점점 희미해졌다. 어느새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20대 청년에서 30대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코로나로 해외여행이 막힌 후, 소파에 누워 여행 유튜버들의 여행 영상을 보고 있다가 문득 9년 전의 약속이 떠올랐다. 나이는 10살이 더 늘었고, 체중은 20kg가 더 늘었다. 20대의 나는 날카로운 눈빛의 배고픈 늑대였지만 30의 나는 졸린 눈에 하품을 하는 배부른 사자였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스크린 속 고프로를 들고 걷고, 뛰고, 웃고, 노래하는 저 여행자들의 행복한 미소를 예전의 나처럼 다시 갖고 싶었다.
그때의 약속을 지키자! 다시 떠나자!
출발지는 우리나라의 북쪽 끝, 고성의 통일 전망대로 정했고, 도착지는 부산 해운대로 정했다. 거리를 네이버 지도로 대략적으로 계산해보니 700km 정도 나왔다. 하루에 40km 정도 씩 걸으면 17일 정도면 완주할 것으로 계획도 대략적으로 세웠다. 물론 숙소도 당일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정하기로 해서 미리 예약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너무도 무계획적인 mbti의 xNxP계열의 인간인 듯 보이지만, 이렇게 두리뭉실한 계획이 2주 이상의 여행에서는 오히려 유연하게 계획을 변경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다고 아무 계획도 하지 않으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대략적이라도 계획을 세우는 행위 자체가 구체적인 실천에 이르게 하는 강한 동기가 된다.
아무런 준비 없이 배낭 하나 메고 떠났던 도보여행 시즌1 과는 다르게 이번 도보여행은 꽤 여러 가지를 준비했다. 한 여름에 작렬하는 태양을 뒤집어쓰며 걸어보니 나는 햇빛에 무척이나 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햇빛 알레르기가 너무 심해서 온몸에 두드러기가 생겼다. 그래서 팔과 다리를 햇빛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는 쿨토시 2쌍을 준비했다. 또한 목과 얼굴을 햇빛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는 일명 '양봉 스타일'도 준비했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찾은 이 '마스크 선캡'은 걷는 내내 나에게 정말 최고의 도움을 주었고, 이번 여행에서 나의 아이덴티티가 되었던 최고의 잇템이었다.
도보여행을 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발바닥의 물집을 걱정하지만, 3일 이상 연달아 걷다 보면 의외로 발바닥 물집보다 무릎관절이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릎과 발목 보호대를 미리 준비했다. 또한 걷는 게 정말 중요한 트래킹화도 구매했다. 트래킹화의 이름이 해파랑 T1500이고, 내가 걷는 고성에서 부산까지의 길의 이름도 해파랑이다.
그 외에도 폭염 속에 걷다가 쓰러지지 않기 위해 준비한 식염포도당과 배낭 뒤에 써붙인 '내 생애 단 한번 2021 여름' 현수막도 있었지만, 정말 중요한 준비물은 바로 이번 여행을 떠나게 된 근본적인 이유, 영상 촬영을 위한 고프로이다!
출발일은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인 2021년 7월 16일. 전날 방학 전 마지막 수업이 마친 여행 지리 수업이었다. 이제 곧 있으면 수능 원서접수를 하는 3학년 학생들에게 내가 왜 이 폭염 속에서 도보여행을 떠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를 겪고 있는 고3 제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동기부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물론 이렇게 학생들 앞에서 도보여행을 떠나는 각오에 대해서 말하면서 나 스스로에게도 응원의 에너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한 손에는 고프로를 들고 머리에는 마치 양봉업자처럼 회색 마스크 선캡을 쓰고 2021년 7월 16일, 37도 폭염을 뚫고 700km의 대장정의 길을 나섰다.
- 2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