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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범준 Jul 20. 2017

가끔씩 다시보는 하루히 시리즈 - 고도증후군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는, 얼핏 보면 대충 쓰인 평범한 학원물 작품일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을 한번이라도 접한 사람이라면, 전반적인 작품에 작가가 숨겨둔 굉장히 세밀한 장치와 복선이 있다는 것을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오늘 소개할 단편은 무료 편에 수록되었던 "고도증후군"이다. SOS단의 여름 합숙, 수수께끼의 사건에 대한 추리극의 형태, 그 밖에도 애니에서의 역전재판 패러디 등, 겉으로 보면 가볍게 재미삼아 볼 수 있는 단편이다. 이런 시시한 단편을 왜 소개하는 것인지 아이러니할 수도 있다.


 여기서 잠깐 필자는 하나 흥미로운 주장을 해보고자 한다.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에서 여러 번 강조되는 소재는 "겉과 속이 다른 것들"이라고 필자는 해석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따로 좀 더 자세히 소개할까 싶은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우선 쿈을 생각할 수 있다. 하루히에게 끌려 다니면서 투덜거리는 SOS단 생활 속에서 여러 번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지만(우울, 소실, 경악) 쿈은 원래의 세계를 즐겼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며 다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뿐만 아니라 쿈의 1인칭에 의해 독자에게 서술되는 SOS단의 겉모습은 실제 단원들의 속마음이라고 대변할 수 없으며, 오히려 다른 경우가 많은데, 이는 쿈의 둔감성이 더해지면서 극대화되기도 한다(특히 우울편). 말하자면, 사에카노에서 아키 토모야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짧게 나열하면, 하루히는 잘 알려져 있듯이 츤데레고, 나가토는 티를 안내지만 엔드리스 에이트를 겪으며 소실에서 결국 고장나버린(...) 사례가 있으며, 아사히나는 카와이한 모에 캐릭터이면서 숨기는 것이 많으면서 위험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코이즈미도 스스로의 연기로 만들어낸 성격이므로 본 모습은 알 수 없다. 말하자면, 작품에서는 쿈이라는 1인칭 시점에 의해, 쿈 본인을 포함하여 많은 등장인물이 겉과 속이 다르게 묘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소재 및 작품적인 해석에 대해서도, 겉과 속을 다르게 봐야 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고도증후군"을 예시로, 겉으로 재미삼아 볼 수 있는 시시한 단편에 오히려 속으로는 심오한 의미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작품에 대해 더욱 이해해보며 그 숨겨진 의미를 찾아본다면,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에서의 새로운 재미를 맛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 이 태풍은 대체 어느 녀석 머리에서 튀어나온 거냐?

(쿈 독백) 이 태풍은 대체 어느 녀석 머리에서 튀어나온 거냐?


 고도증후군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SOS단은 여름 합숙으로, 코이즈미가 준비한 외딴 섬의 저택에 가게 된다. 태풍(폭풍우라고 하기도 함. 이하 태풍)이 몰아치는 그곳에서, 한 살인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태풍과 고도라는 환경으로 인해 SOS단 단원들과 저택 사람들을 제외하고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클로즈드 서클"이라는 개념이 성립된 상태이다. 쿈과 하루히는 진상을 밝히기 위해 추리를 시작하고, 가짜 진상에 맞딱드려 좌절하기도 하지만, 추리 끝에 진짜 진상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짜 진상이란, 유타카가 케이이치를 살해하는데 실패했는데, 쿈, 코이즈미, 아라카와가 몸통박치기로 잠긴 문을 열면서 그 시점에 케이이치가 사망해버렸다는 추리이다. 여기에 도달한 하루히는 좌절하고 단원들을 위해 추리를 멈추게 되지만, 쿈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진짜 진상을 향해 나아간다. 진짜 진상이란, 이 살인사건이 코이즈미를 중심으로 저택 사람들인 아라카와, 모리, 케이이치, 유타카(모두 기관 사람들)가 준비한 이벤트라는 것이다.

 이 추리 과정에서, 하루히와 쿈이 명확히 밝히지 못한 것이 있다. 고도에서의 클로즈드 서클은 태풍이 와야 성립된다. 그렇다면 이 태풍의 출처는 어디인가?


(코이즈미) "그렇죠, 고도입니다. 어떠한 이유로 섬에 갇혀 탈출 불가능 상황이 된 가운데의 연속살인이라도 기대하고 계신 건 아닐까요. 클로즈드 서클로는 눈보라치는 산장과 폭풍우 치는 고도, 그들은 공권력 개입을 방지하는 무대로서는 쌍벽을 이루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원작 소설과 애니는 많은 부분이 비슷하지만 사건과 추리 전개에서 세세한 부분이 조금 다르긴 한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위는 원작 소설에서의 고도증후군 도입부에서 코이즈미의 대사이며, 애니의 고도증후군 도입부에서도 똑같이 클로즈드 서클에 대해 설명해주는 장면이 있다. 코이즈미는 마치 이번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 태풍이 올 것임을 전제하고 있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코이즈미와 같은 기관의 초능력자들은 폐쇄공간과 관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초능력을 발휘할 수 없으며, 그저 일반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전에 야구대회를 생각해보자. 쿈은 나가토에게 비를 내려 경기를 취소할 수 없을까 했는데, 만능 우주인 나가토 조차 말하길, 이후에 혹성에 있을 부작용을 걱정하여 쿈에게 추천하지 않는다고 전했었다. 아사히나는 말할 것도 없는데, 시간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능력이 없으며 그것조차 제한적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쿈) "태풍이 온건 우연이거나, 아니면 하루히가 어찌어찌 했겠지. 그거야 뭐 별 상관없다."


 애니와는 달리 원작 소설에서는 추리 쇼를 쿈이 진행한다. 추리를 시작하는 부분에서 쿈은 태풍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을 피하고, 우연이거나, 하루히가 어찌어찌 했겠지라고 말한다. 일단 이 추리는 어느 정도 합리적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태풍이라는 소재는 우주인, 미래인, 초능력자도 준비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제 쿈이 우리에게 남겨준 선택지는 2가지이다. 우연일까? 하루히의 발상일까?

 일단 작품으로 돌아가 정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정리해보자. 우선 태풍에 대한 것부터 살펴보자. 원작과 애니에서 날씨 상태에 대해 거의 동일한 묘사가 나타나고 있다.


- 첫째 날 : 맑음

(코이즈미) “맑은 날씨라서 잘 됐네요. 항해하기 딱 좋은 날이라 해도 무방하겠죠.”
(쿈 독백) 잔잔한 바다는 무사쾌청. 지금으로선 일단 태풍은 없는 듯 하다.


- 둘째 날 : 갑자기 태풍

(쿈 독백) 둘째 날 아침. 날씨가 갑자기 폭풍우로 변했다.
(하루히)  “참나. 이럴 때에 태풍이 오다니. (중략) 근데말야, 이걸로 정말 폭풍우 치는 고도가 됐어.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상황이라구. 역시 진짜 사건이 터질지도 모르겠어.”
(쿈 독백) 어제 시점에서 태풍이 온다는 정보는 아무데서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이 태풍은 대체 어느녀석 머리에서 튀어나온 거냐?


- 셋째 날 : 여전히 태풍

(쿈 독백) 그 셋째날 아침, 호우와 폭풍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모두가 케이이치를 쓰려져 있는걸 보고 사건이 일어난 것을 확인] (아라카와) “폭풍우가 그치는 대로 온다고 합니다. 예보에 따르면 내일 오전중엔 날씨가 회복되는듯 하오니 그쯤이 되지 않을까요.”


- 넷째 날 : 이제 맑음

(쿈 독백) 태풍이 급히 지나간 푸른 하늘 아래.


 클로즈드 서클이 되기 전에는 다들 고도로 들어가야 하므로 첫째 날은 맑아줘야 한다. 둘째 날, 셋째 날로 연결되면서 사건이 발생하는데, 태풍이 불어주면서 클로즈드 서클이라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넷째 날은 태풍이 짠하고 소멸되어 맑았는데, 마치 클로즈드 서클이라는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교묘하게 태풍이 불어준 것처럼 느껴지지 않은가? "어제 시점에서 태풍이 온다는 정보는 아무데서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쿈의 말을 생각해보자.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형편 좋은 태풍이 아닌가? 아니,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에서 우연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얼마나 있을까?


 태풍이라는 날씨에 대해 살펴보았고, 이제 다른 정황을 살펴보자. 우선 전반적인 사건에 대해 살펴보면, 대부분 동일하지만, 사건과 추리의 전개에서 애니와 원작에서 다소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다. 우선 중요하지 않은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케이이치에게 온기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의 사망 시각이 얼마 지나지 않았으며, 이것이 힌트가 되어 가짜 진상으로 이어지는데, 이를 알게 되는 경로가 다르다. 애니에서는 하루히가 우연히 온기를 확인했으며(코이즈미쪽이 컨트롤하지 못했다) 원작에서는 코이즈미가 나가토에게 체온을 물어보고 쿈과 하루히가 알게 되는 방식이었다. 그 외에도 원작에서는 글로 확인하기 좋은 힌트들이 사용되며, 애니에서는 눈으로 확인하기 좋은 힌트들이 사용된다는 점 정도가 있겠다(예를 들어 당근이 남아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쓴 식사). 중요한 차이는 결말에서의 추리 쇼에 대한 부분인데, 진짜 진상을 밝혀낸 것은 공통적으로 쿈이지만, 애니에서는 하루히가 추리 쇼를 했으며, 원작에서는 하루히 없이 쿈이 코이즈미에게 이야기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애니와 원작의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2) 하루히가 바란 것

 태풍이 우연이라는 것과 하루히에 의한 것이라는 2가지 의견에서, 우선 필자의 의견을 밝히면, 후자에 동의한다. 그런데 하루히는 정확하게 무엇을 바랐기에 태풍이 불었던 것인가?

 여기서 잠깐, 하루히의 능력 발휘에서도 겉과 속을 구별해서 이해하는 것 또한 꽤 좋은 시도일 것이다. 흔히 알려진 이야기로, 스즈미야 하루히가 우주인을 바랬다기보다는, 나가토 유키라는 캐릭터를 바랬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부분이 시사 하는 바는, 하루히가 원하는 것이 실제로 이뤄지는데 있어, 입으로는 우주인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실제의 마음속으로는 단지 이름뿐인 우주인이 아닌 내용적인 부분까지 생각하여 나가토 유키라는 캐릭터를 원했다는 것으로, 이처럼 겉과 속을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시 고도증후군으로 돌아가 보자. 도입부에서 하루히는 겉으로는 사건을 입에 달고 다니며, 이것만 보면 겉으로는 하루히가 원하는 것이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막상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오히려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루히) “설마했는데. 이런 일이 터질 줄은 생각도 못했어.”


 우울 편에서 코이즈미는 하루히가 상식적이면서도 기행적인 면모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균형잡혀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아무리 하루히라고 하더라도 실제 살인 사건을 바랄 정도로 비상식적이진 않다. 그렇다면 하루히가 바란 것이 살인 사건이 아니라면, 하루히는 무엇을 바란 것일까? 하루히가 바란 것을 확인하는 좋은 방법은, 결과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때 원작과 애니에서의 추리쇼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즉 하루히가 바란 것에 대한 해석이 다를 수 있다.

 사실 애니와는 대조적으로 원작은 다소 허무하게 끝난다. 하루히는 가짜 진상에서 추리를 중단하고, 진짜 진상에 도달한 쿈이 코이즈미와 1:1로 대화하며 추리 쇼를 진행하게 된다. 입으로는 사건을 달고 다니지만, 결국에는 사건보다 단원들을 더 걱정하는 하루히의 면모로 해석될 수 있다. 역시 겉과 속이 다르다. 한편 애니에서는 쿈이 진짜 진상을 밝혀내고, 하루히가 추리 쇼를 했다. 명탐정이라는 완장을 쓰고 말이다.

(코이즈미) "그러니까 말이죠, 쉽게 말씀드리면 그녀는 명탐정이 되어보고 싶으신 겁니다. 합숙의 목적은 그것입니다.”


 도입부에서 코이즈미는 하루히가 목표가 명탐정이 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이 해석은 꽤 맞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살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하루히는 진짜 진상을 추리 쇼에서 밝히고, 명탐정이 되었다. 그리고 코이즈미가 준비한 여흥을 즐기게 되었다. 이는 모두 하루히가 속으로 바란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다. 하루히는 겉으로는 사건 사건을 입에 달고 다니지만, 속으로 바란 것은 실제 살인 사건이 아니라 명탐정이 되고 여흥을 즐기는 것이다. 그런데 명탐정이 되기 위해서는 평범한(...) 사건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미궁 속에 빠진 사건, 복잡한 사건이어야 한다. 여기서 명쾌한 추리를 제시할 때 비로소 하루히는 명탐정이 되고 재미를 극대화할 수 있다. 그래서 하루히는 평범한 고도가 아니라 클로즈드 서클이라는 상황을 완성시키고 싶었고, 태풍이 불어온 것이다.


(하루히) “근데말야, 이걸로 정말 폭풍우 치는 고도가 됐어.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상황이라구. 역시 진짜 사건이 터질지도 모르겠어.”


 이 대사는 평범하게 넘어갈 수 있지만, 굉장한 힌트를 제공하고 있다. 쿈의 경우 도입부에서 클로즈드 서클이라는 개념을 코이즈미에게 들었는데, 이는 쿈과 코이즈미 사이의 이야기였다. 대부분의 독자들도 이때 클로즈드 서클이 무엇인지 이해하였기 때문에 쉽게 넘어갈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루히의 경우 들은 장면이 없었다. 그런데 위의 대사를 보았을 때, 하루히는 1) 개념적으로 클로즈드 서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또한 2) 지금 상황에서 태풍과 고도가 만나 클로즈드 서클이라는 개념이 성립하였음을 이해하였다는 것이다. 사스가 미스테리 용어에 빠삭한 단장님.. 즉 클로즈드 서클이라는 배경지식이 있으며, 이를 현 상황에 발현시켰을 때 더욱 흥미진진한 사건이 일어날 것임을 이해하고 있다는 2가지 조건 하에서, 하루히는 이 고도에 태풍에 불어주기를 바랬으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으로 보는 것에는 무리가 없다.

 여기서 코이즈미는 이러한 하루히의 생각을 처음부터 예상했음이 틀림없다. "어제 시점에서 태풍이 온다는 정보는 아무데서도 들어오지 않았다고."라는 쿈의 말을 생각했을 때, 첫째 날에는 태풍이 온다는 정보가 없었으는데, 클로즈드 서클 운운하면서 마치 태풍이 올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던 코이즈미의 행동을 생각해보자. 즉 코이즈미는 일기예보보다 더 정확한 정보의 출처를 알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코이즈미 및 기관 사람들이 준비한 무대에서 하루히의 생각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히 시리즈에서는 코이즈미가 설명충 포지션을 담당하는데, 말하자면 하루히가 어떤 생각과 의도로 무엇을 발현시켰는지를 쿈에게 설명해주는 역할이다. 코이즈미를 비롯한 기관에서 중학교 시절부터 하루히를 관찰해왔다는 것은, 비록 우발적이게 보이더라도 하루히의 사고와 행동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깊다는 것임을 말한다. 심지어 코이즈미는 고도증후군 도입부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코이즈미) "명탐정이나 클로즈드 서클 운운하는 것은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스즈미야상의 사고패턴을 읽어 말씀드린 것 뿐입니다."


 즉 코이즈미는 하루히의 사고패턴을 읽을 수 있다. 이는 굉장한 것인데, 하루히가 어떤 조건에서 어떤 사고를 하며, 여기서 하루히의 능력이 개입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풋에 따른 아웃풋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소실에서 나가토의 경우 하루히의 능력을 빼앗아 세계 개변을 직접적으로 일으켰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코이즈미는 특정 상황을 연출하면, 자신에게 유리한 현상을 하루히로부터 간접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새로운 가설을 세울 수 있는데, 코이즈미를 비롯한 기관에서 준비한 이번 사건은, 하루히의 능력을 그들이 예상한 방향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일종의 실험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들 수 있다.


3) 아사히나 이야기

 여기서 잠깐 이야기를 해볼 것이 있다. 편의상 애니의 결말을 따라, 하루히가 바란 것이 실제 살인 사건이 아니라 명탐정이 되고 여흥을 즐기는 것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 소망은 언제 품게 되었던 것인가? 하루히가 원한 "사건"이라는 것은 셋째 날에 결국 일어났는데, 이는 원래 기관에서 준비했기 때문에 일어날 예정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하루히가 "사건"이라는 것을 노래 부를 정도로 원했고 그에 따라 일어난 것이기도 하다. 즉 일어날 예정인 사건에 대해 하루히가 원하게 되면서 발견하게 되었다는 해석이 있을 수 있으며, 혹은 그 사건 또한 하루히가 원했기 때문에 일어날 예정이 되었다는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아사히나 측의 하루히 능력에 대한 해석과, 코이즈미측의 하루히 능력에 대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아사히나를 비롯한 미래인 측의 하루히의 능력에 대한 해석은 이전에 나가토가 정리해준 적이 있다. 한숨 편을 참고하자.


(나가토)  “아사히나 미쿠루의 주장은 이렇다고 생각된다. 스즈미야 하루히는 조물주가 아니다. 그녀가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세계는 이 모습 그대로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초능력이나 시간이동체, 개념형 지구외생명체 등의 초자연적 존재는 스즈미야 하루히가 갈망함에 따라 생겨난 것이 아닌, 원래 그랬던 것이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역할은 그들을 자각 없이 발견하는 것으로서, 그 능력은 3년 전부터 활성화되었다. 단 그녀의 발견은 자기인식에 도달치 못했다. 그녀는 세계의 이상(異常)을 탐지할 수 있지만 결코 인식할 수는 없다. 인식을 방해하는 요소 또한 여기 존재하기 때문에.”
(나가토)  “코이즈미 이츠키와 아사히나 미쿠루가 스즈미야 하루히를 보는 역할은 각각 다르다. 그들은 서로의 해석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전혀 다른 서로의 이론은 자신들의 존재기반을 흔들리게 하기 때문에.”


 쉽게 생각하면 코이즈미 측의 경우 하루히가 바란 무엇인가가 그대로 세계에 구현되는 관점인 반면, 아사히나 측은 하루히가 바란 소망과 그로 인한 모든 사건은 예정되어 있었다는 해석을 한다. 결국에는 하루히의 능력이 발현되는 "시점"의 차이이며, 둘 중 어느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증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고도증후군을 생각해봤을 때, 여기서는 아사히나의 관점이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가는 부분이 많다. 아사히나의 해석으로 이해하면, 고도증후군의 사건은 하루히가 원한 것은 맞지만, 원하는 마음이 생기자마자 즉각적으로 일어났다고 보기 어렵다. 당시에 원했지만, 사건은 이미 코이즈미를 비롯한 기관 사람들이 치밀하게 이전부터 계획을 짰었고 준비되었으며, 일어날 예정이었던 것을 하루히가 원했으며 "발견"했다고 봐도 맞을지 모른다.


(코이즈미) “바꿔 말씀드리면 명탐정이 나타나는 곳에 기괴한 사건이 터지게 되는 겁니다. 우연히 사건과 마주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명탐정이라 불리우는 인간에겐 사건을 부르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겠죠. 사건이 있고 그곳에 탐정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탐정역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사건이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코이즈미도 나름의 입장에서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 도입부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건이 있고 그것을 명탐정이 발견하는 것이 아닌, 명탐정이 있기 때문에 사건이 일어난다는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흔히 코이즈미가 입에 다는 이야기처럼, "세계가 오늘(혹은 방금) 창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보는 관점. 즉 하루히가 사건을 원하면 그 즉시에, 코이즈미와 기관 사람들은 원래부터 사건을 준비했던 세계가 된다는 관점이다. 양자역학에서는 확률로 존재하는 것이 관측함에 따라 물리량이 결정된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이런 부분에서 코이즈미쪽과 아사히나쪽의 하루히 능력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부분은 작품 자체가 쿈이 과거를 회상하는 것처럼 이야기 되므로, 시점에 대해 명확하게 증명하기란 꽤 어려울지도 모른다.


4) 기타 이것저것

 추가적으로 몇 가지 주제를 더 다루고자 한다. 우선 쿈신설에 대해. 하루히 시리즈를 해석하는데 있어, 쿈의 정체에 대해 몇 가지 설이 있으며, 그중 흔히 알려진 것은 쿈신설이다. 즉 하루히가 아닌 쿈이 신이라는 것. 이 해석에 대해 필자는 완벽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고도증후군에서는 꽤 통하는 부분이 있어 흥미롭다.

- 개념적으로 클로즈드 서클을 이해하고 있으며, 태풍을 고도에 연출했을 때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하루히 뿐만 아니라 쿈 또한 그렇다.

- 쿈은 이러한 하루히적인, SOS단적인 비일상을 즐기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한 바가 여럿 있다. 이를 생각했을 때, 고도에 도착하자마자 사건을 입에 달고 다니는 하루히에게 그런 게 있겠냐는 태클을 걸지만, 실제로 쿈은 마음속으로 사건을 바랬을 가능성이 크다.

- 코이즈미가 연출한 상황에서 실제로 "명탐정"이 된 것은 쿈이다. 즉 실제 살인 사건이 아니라 명탐정이 되고 여흥을 즐긴 것은 쿈이다. 원작에서는 쿈이 진짜 진상에 도달할 뿐만 아니라 추리쇼 역시 본인이 진행하였다. 한편 애니에서는 추리쇼를 하루히가 진행하지만(역전재판 패러디와 함께), 진짜 진상에 도달하는 것은 역시 쿈이다.

 어쩌면 쿈과 하루히가 공명하는 부분에서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하는 가설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외에도 고도증후군에서 꽤 흥미로운 주제는,

(코이즈미) “그저 별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외딴 섬일 뿐입니다. 그곳엔 괴물도, 광기 있는 박사도 없습니다. 제가 보증하죠.”


 즉 코이즈미의 "보증"이 반드시 진실이라고 할 수 없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루히)  “산으로 할까 바다로 할까 고민좀 했었어. 처음엔 산이 더 가기 쉽지 않을까 했는데, 눈보라치는 산장에 갇히기엔 계절이 아니고 해서.” - (도입부)
(하루히) “겨울 합숙도 부탁해, 코이즈미군. 그땐 좀더 완벽한 시나리오를 생각해놔, 알았지? 그땐 산장에 갈꺼니까. 그리고 폭설은 꼭 내려야돼. 그리고 또 그땐 더 저택같이 안생겼으면 화낼거야. 응. 지금부터 기대하고 있을게!” - (마무리)


설산증후군에 대한 계획이 고도증후군 집필 시절부터 되어있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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