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불짜리 스웨터

지르는 가정주부의 마음

by 솔스티스

검붉은 체리 주스 자국이 아직 덜 마른 채로 바닥에 묻어있다. 누가 보면 핏자국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진득하다. 어제저녁 둘째가 식탁에서 놀다 흥건히 쏟아부은 흔적이다. 아무도 치우지 않았고 내가 나서지 않는 한 내내 그대로 있을 것이다.

이 스웨터를 산 건 아닙니다

어젯밤 나는 모든 일을 멈추고 400불짜리 스웨터를 질렀다. 아이들을 겨우 재우고 거실 소파로 나와 앉으니 11시였다. 어김없이 늦게 와 늦은 저녁을 간단히 먹고 있는 남편을 뒤로하고 다급히 휴대폰을 켰다. 자정에 세일을 마감하는 한 패션브랜드 사이트에 들어가 위시리스트에 넣어둔 아이템의 재고를 확인했다.


원래 가격은 460불. 할인을 받으면 얼추 350불이 된다. 지난겨울부터 눈여겨봤던 네이비색 스웨터였다. 스웨터 한 장에 400불 이상을 써본 적이 없어 가끔 사이트에 들어가 아련하게 구경만 했던 옷이었다. 그러다 봄맞이 세일이라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세일 마감 시간까지는 1시간도 채 남지 않았지만 장바구니에 넣어둔 그 스웨터를 결제하기까지 한참을 고민했다. 막상 할인을 받고 보니 배송료와 세금이 붙어 총결제액이 400불까지 불어나있었다.


시험 종료 종이 울리기 전까지 마지막 한 문제를 붙잡고 있는 수험생마냥 휴대폰을 꼭 붙잡고 있었다. 11시 58분. 2분을 남기고서야 결제 버튼을 눌렀다. 평소 나를 결정장애라고 놀리는 남편은 나의 이 조용한 난리법석이 익숙한 풍경인 듯 뒤돌아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밥을 먹고 있다. 사든 말든 다 좋으니 결정이나 하라던 남편, 이제 결론이 났으니 편안하게 드시길.


400불은 유난히 큰 액수로 다가왔다. 400불이면 첫째 아이의 한 달 예체능 활동비를 낼 수 있다. 주말에 호텔 수영장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호캉스를 즐길 수 있는 금액이며 우리집 한 달치 수도세이기도 하다. 한 끼에 80~100불에 육박하는 배달음식을 네다섯 번 시켜 먹을 수 있는 돈이다.

원화로 따지니 가격에 더 압도됐다. 약 58만 6000원. 스웨터 한 장을 이 돈 주고 사다니 제정신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밤 잠을 설치고서 아침이 되어서도 여전히 본전 생각에 매였다. 이미 늦었지만 이메일을 보내 취소를 해야 하나 안절부절못했다. 그 돈에 50불을 더 얹으면 그 브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시그니처 스웨터를 살 수도 있었는데 차라리 그걸 사는 게 나았나 갈팡질팡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는 것보다 가성비를 따지고 있었다.


비교도 해봤다. 남편이 지난 크리스마스 선물로 고른 250불짜리 체스판, 아이 선물로 고른 150불짜리 인형집과 200불어치의 주문한 아이 겨울옷 여러 벌. 이러니 저러니 400불짜리 스웨터에는 못 미쳤다.


비교를 하고 나니 더 양심에 찔렸다. 남편은 사라고 했지만 눈치가 보였다. ‘좀 비싸긴 하네’라는 남편의 지나가는 말 때문에 더 맘 졸였을까.


어쩌면 남편의 그 말이 결정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싸긴 하지만 당신 요즘 고생 많았으니 그 정도는 사도 괜찮아’라는 남편의 확실한 결제승인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지금 내 마음이 더 가벼웠을 수도 있다.


그래, 그랬다면 내 마음이 훨씬 편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뿐일까. 단순히 남편 탓으로 돌리기엔 심정은 좀 더 복잡했다. 언젠가부터 집안의 대부분의 큰 결정은 남편에게 미루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해 정하는 식이었지만 의견이 다르면 대부분 남편이 하자는 대로 했다.


참 신기했다. 어릴 때부터 누가 봐도 고집세고 주관 강하기로 소문난 아이였는데 말이다. 아마 결혼 후 아이를 출산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육아에 정신과 체력이 집중된 까닭도 있지만 동시에 내가 경제활동을 중단한 점도 ‘결정장애’가 된 이유다.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른다.


돈 한 푼 벌어오지 않는 내가 값비싼 스웨터 한 장을 누릴만한 가치 있는 사람일까. 치사하지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다. 나는 이 집에서 (불필요한 물건에 대한) 경제적 결정권은 없다. 뒤집어 말하면 나는 육아를 하고 살림을 하는 가정주부로서의 내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있는 셈이다. 남편만큼이나 매일이 힘들다고 할 정도로 ‘가사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이런 결정의 순간엔 내 가치를 묵살해 버리는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결국 일터로 나가는 것이 답인 것인가. 언젠가는 일터로 돌아갈 계획이지만 나는 평생 가정주부로 살더라도 이렇게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굴하지 않고 내 의지를 관철시키는 연습을 해야 한다.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집안에서 내 목소리는 소리소문 없이 사라질 테니.


스웨터 배송이 시작됐다는 이메일을 확인했다. 곧바로 물티슈를 가져와 식탁 아래 체리주스 흔적을 닦았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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