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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 숨 May 10. 2024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2024.5.10


예전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은 첫째 머리가 뛰어나서 잘하거나, 둘째 열심히 노력해서 잘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을 ‘우와’하고 보는 것은 타고난 머리가 잘남에 대한 것이거나 노력에 대한 것일 텐데, 머리가 좋게 태어난 건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그냥 운 좋게 그렇게 태어난 것이고, 노력한 것을 좋게 보자니 공부를 잘 못 하는 사람은 공부에 대해 노력을 안 했을 뿐 (다른, 더 좋게 생각한 것에 노력했거나 그냥 아무 것에도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인 건데 대체 무엇을 좋게 평가한다는 것인가. 결국 “노력”에 대한 것인가? 라는 생각.


한 번도 아니고 사실 여러 번 했다. 

머리가 좋게 태어난 건 그 사람이 뭐 착하게 굴거나 남들보다 뭘 더 한 것도 아닌 그야말로 타고난 것이니 남한테 뻐길만 한 것이 못되고. 노력은 글쎄. 공부말고 다른 것에 노력해서 그걸 잘 한다면 그걸 인정해주면 되지 꼭 공부에만 노력해야 되는 건 아니잖아? 라는 생각.


대체 왜 공부를 잘 하면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걸까 이상하다. 그러다 모르겠다, 공부나 하자.



마이클 샌델이 말한 것도 내가 생각하던 이걸 따지고 드는 것 같다. 나야 “공부”라는 좁은 범위에서만 생각한 것이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 적용하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일반적으로 타고난 능력은 운인 것이고, 똑같이 노력해도 출발점 자체가 다르면 결과가 달라질 텐데 지금의 능력주의는 그런 것은 보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논쟁은 능력주의 자체를 따지지는 않고, 어떻게 그 원칙을 실현하느냐를 놓고 이뤄진다.” (33)

“재능 덕분에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그와 똑같이 노력했지만 시장이 반기는 재능은 없는 탓에 뒤떨어져 버린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52)



아이들, 주로 첫째에게 가끔씩 얘기해주는 것이 있다. 세상에는 돈을 잘 벌 수 있는 직업과 그렇지 않은 직업이 있는데 능력이 있다고 잘났다고 모두 돈을 잘 버는 것은 아니고 모두가 좋아하는 것과 해야하는 것은 다 다르다는 것이다. 마치 금전적인 보상이 큰 일은 더 좋은 일이고 잘난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후지다고 생각할까봐, 지금 이 사회가 너무 그렇게 보여서 걱정스러워 몇 번 잔소리처럼 얘기했다. 무엇에 더 가치를 두고 사는 지는 사람마다 다를 텐데, 그 기준이 점점 더 “돈”이 되고 있는 세상이라 좀 기가 막히기도 하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공부를 잘 하는 애가 의대에 가긴 했지만, 공부를 잘 한다고 모두 의대를 가진 않았다. 정말 학문의 길로 가는 애도 있었는데, 요즘은 아닌 것 같다 (내 비슷한 또래들과 몇 번 비슷한 의견을 나눈 적도 있다). 결국 의사가 되고자 하는 이유의 대부분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면서도 경제적 보상이 크기 때문일 텐데. 의사뿐만 아니라 변호사, 어느 회사 임원, 사장 등등 돈을 잘 버는 위치가 되면 성공한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확실히 내가 어린 시절보다 “돈”이 최고인 사회가 된 것 같다. 그런 모습에 내가 눈을 감아도 남들이 나를 보는 시선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도 없다. 나도 가끔 ‘욱’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니. 내 줏대를 세우고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이다. 



샌델 역시 책을 통해 뭐라고 명확히 결론을 내리거나 어떻게 해야 한다는 확고한 주장을 펼치지는 않는 듯 한다. 그저 일의 존엄성에 대해, 공동선에 대해 논쟁을 계속하자고, 논쟁이야말로 현 상황에 대한 저항이라고 한다. 하긴 뭐라고 주장한들, 그게 지금 세상에 먹히기나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마지막에 재능과 능력을 가진 자의 “겸손—그저 그렇게 태어난 운이지 네가 잘난 게 아님을 명심할 것”이 필요함을 덧붙인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게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353) 


아니 이렇게 장황하게 긴 책의 결론이 “겸손”이란 말인가 할 수도 있지만, 이는 대단한 도덕적 목표를 가지거나 정의 실천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닌 그게 이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지탱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한다. 예나 지금이나 가진 자가, 높이 올라간 자가, 서있는 자가 겸손하기란 쉽지 않은데 말이다.




나는 읽으면서 성경에서의 달란트 비유가 생각났다.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다섯 달란트를 남긴 자나, 두 달란트를 가지고 두 달란트를 가진 자가 똑같은 칭찬을 듣는다. 그리고 더 가졌음에 대해 시기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다섯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를 가진 자를 더 우러러본다. 타고나기도 많이 갖고 태어나 많이 남긴 자. 역시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건가.







- 글을 발행한 뒤 보니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과 필요 부분만 발췌한 것인데, 이렇게 쓰면 책에 대한 오해가 있을 듯 하여 조금 더 덧붙이자면,

샌델은 지난 40년간 미국을 중심으로 심화된 능력주의가 과연 공정한지, 능력주의에 의거한 보상이 과연 타당한지, 거기에서 소외되는 혹은 뒤떨어진 사람들이 받게 되는 모욕은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 묻고 그 허구에 대해 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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