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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민 Aug 01. 2019

연필의 속도

연필 같은 사람과 볼펜 같은 사람

나는 책을 더럽게 읽는 편이다. 읽는 도중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페이지 구석구석에 옮겨 적고 한 번만 읽고 버리기 아까운 문장들이 있는 페이지에는 포스트잇도 덕지덕지 발라놓는다. 그래서 책은 나에겐 그저 읽을 만한 텍스트가 아니라 끊임없이 고민할 주제를 던지고 머리에 집어넣어야 할 새로운 지식을 쏟아내는 교과서다.  

    

책을 읽을 때면 나는 항상 펜이나 연필을 손에 쥐고 있어야 안심이다. 방금 전 떠오른 생각들이 휘발되기 전에 어서 빨리 적어놔야 되므로 필기구 없이 책을 읽으면 불안하다. 생각이 마구 샘솟을 때는 아이디어와 아이디어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분수처럼 터진다. 이때 제 능력을 발휘하는 건 단연 연필이다.     


연필은 끝이 뭉툭하다. 커터 칼로 깎아놓으면 아무리 요령을 부려도 끝이 뾰족하기가 쉽지 않다. 뭉툭해서 투박하다. 두꺼워서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머리가 팽팽 돌아 생각들이 흰 종이 위로 뛰어나가고 싶다고 아우성칠 때, 샤프로 글을 휘갈기다가는 힘없이 툭 하고 부러질 때가 많다. 어서 빨리 다음 문장을 써 내려가야 하는데, 부러진 만큼의 샤프심을 뽑아내려 열심히 샤프를 딸각거리는 순간, 그때만큼 조급하고 답답할 때가 없다. 딸각 소리에도 빨리 나와주지 않는 샤프심에 집중하다가 적어야 할 내용은 까먹고 짜증만 남는 순간이면 그때만큼 속상할 때가 또 없다.     


부러지지 않는 걸로는 펜이 제일이다. 그렇지만 펜은 너무 빠르다. 볼펜 끝에서 잉크의 양을 조절하는 작은 쇠공은 가끔 제멋대로 종이 위에서 미끄러진다. 펜을 쥔 손을 내 힘으로 움직이지 않아도 저 혼자서 슥슥 글씨를 그려나가는 볼펜은 어쩐지 그다지 애정이 가지 않는다. 오롯이 내 힘으로 쓴 글이 아닌 것 같달까. 볼펜에게서는, 줄어든 몽당연필의 키처럼 땀 흘리며 글자를 적어온 시간을 찾아볼 수도 없다. 끝까지 닳은 흑연을 다시 깎으며 내일을 준비하고 고민할 시간을 주지도 없다. 글씨가 흐릿해 잉크가 수명을 다함을 알리면, 볼펜심 비닐 하나 툭 까서 리필한 다음 다 쓴 심은 쓰레기통에 버리면 그만이다. 빠르고 편리한 펜이지만 나에겐 여러모로 아쉬움 투성이다.     


생각을 쏟아내는 속도를 자주 감당하지 못하는 샤프와 내 머리보다 두어 걸음 앞서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볼펜. 이와 달리 뭉툭하고 둔하기 짝이 없는 연필심의 끝은 내가 손가락에 힘을 주면 주는 대로,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우툴두툴한 지(紙) 표면에 흑연을 심는다. 힘을 주면 더 진하고 더 두껍게, 힘을 빼면 연하게 희미하게, 쓰던 연필을 반 바퀴 정도 돌려서 쓰면 글씨 굵기를 달라지게 하는 멋도 부릴 수 있다. 나는 제멋대로인 볼펜을 닮은 걸까. 내 멋대로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걸 보니 나는 볼펜이네. 하하, 난 볼펜을 닮았기에 연필을 좋아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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