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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현 Jan 13. 2021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는 법

<셔터 아일랜드>에 대한 라캉적 주석

본 리뷰는 영화 <셔터 아일랜드>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직 영화를 관람하지 않은 분들은 관람 후에 이 글을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4의 규칙


<셔터 아일랜드>에는 숫자 4와 관련된 장면들이 유독 자주 등장한다. 주인공 테디의 아파트 화재사건 사망자는 4명, 파트너인 척의 근무 기간도 4년. 그리고 실종된 레이첼 솔란도의 메모에 남겨진 '4의 규칙'까지.


영화 <셔터 아일랜드>의 한 장면. 사라진 레이첼이 남긴 쪽지.


원래 정신분석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숫자는 3이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자식의 삼각관계를 통해 무의식을 분석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 역시 숫자 3을 중요시했다.


하지만 에드가 엘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을 해석한 라캉에게, 철학자 데리다는 강한 비판을 쏟아낸다. 라캉이 정신분석적 3자 관계에 집착한 나머지 작품에 드러나있는 '2'와 '4'의 중요성을 보지 못했다고 말이다.


데리다의 비판을 의식했는지, 라캉은 자신의 정신분석 이론에 은근슬쩍 '4'의 중요성을 끼워 넣는다. 라캉은 원래 실재, 상상계, 상징계로 이루어져 있던 보로메오 매듭에 '생톰'이라는 네 번째 원을 추가하기에 이른다.


라캉의 보로네오 매듭.


라캉에게 상상계란 유아적인 공간이다. 어머니와 아이의 이자 관계가 지배하는 영역이며, 자신과 타자의 결핍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이다. 반면에 상징계는 그 결핍을 눈치챈 사람들이 진입하는 곳이며,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곳이다. 만약 상징계로 진입할 때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결핍을 인정하지 않은 채로 상상계에 머무르게 되면 히스테리 또는 강박증에 걸리게 된다.


그러나 상징계에 진입한 사람 또한 문제에 부딪힌다. 왜냐하면 자신과 타자 안에 있는 결핍은 결코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라캉은 <도둑맞은 편지>에서 '편지(letter)'가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못하듯이, 인간이 욕망하는 대상 또한 소유되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캉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거나 숨기지 말고 그것을 쫓으며 언어로 표현하는 삶을 살라고 조언한다. 그것이 바로 ‘생톰’이자, 자기 자신이 편지가 되어 더 이상 편지를 소유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다.




빗금 쳐진 주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다. 하지만 개중에는 맛있는 와인과 멋진 풍경을 즐기려고 순례길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 얼핏 보기엔 이들이 속물적으로 느껴질지라도, 라캉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더 건강한 사람들일 수 있다.


라캉에게 주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언어(더 정확히는 기표, Signifiant)가 지배하는 세상에 들어온 인간은 필연적으로 분열을 겪게 되어있으며, 그 분열로 생긴 빈 공간이 바로 주체(Subject)이다. 따라서 라캉에게 '진정한 나'란 존재하지 않으며,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욕망하는 주체만이 존재할 뿐이다. 라캉은 이를 알파벳 S에 빗금(/)이 쳐진 기호를 통해 나타냈다.  



<셔터 아일랜드>에서 주인공 테디는 자신의 원수인 래디스를 추격하기 위해 정신병원을 조사한다. 래디스가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 화재를 내서 자기 부인과 아이들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의 내용을 통해 부인을 살해한 사람은 테디 자신이며, 테디의 환상 속에 등장한 래디스는 가상의 인물임이 밝혀진다. 그리고 환상 속의 래디스는 얼굴에 사선으로 빗금 쳐진 흉터를 가지고 있다. 이는 래디스가 곧 테디 자신임을 암시한다.


영화 <셔터 아일랜드>의 한 장면. 테디의 환상 속에 나오는 래디스.




등대: 새로운 팔루스


주인공 테디는 셔터 아일랜드 안에 있는 등대에서 암암리에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믿는다. 과거 정신의학계에서 행해졌던 수술이자, 현재에는 잔인성과 부작용으로 인해 금지된 전두엽 절제술(lobotomy)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강제로 시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에서 알 수 있듯이 공산주의자의 음모 따윈 없었으며, 등대는 진실의 장소이자 참된 치료의 장소였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에는 참된 치료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존재한다. 그것은 타인의 언어를 버리고 자기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표출하는 것이다. 라캉은 언어(기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언어를 '팔루스'라고 주장했다. 팔루스는 원래 남근을 의미하지만, 라캉의 팔루스는 생물학적 남근을 뜻하지 않고 보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참된 치료를 위해서는 남들이 제시하는 팔루스를 버리고 새로운 팔루스, 자기 자신만의 팔루스를 가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주인공 테디가 치료의 장소인 등대로 향하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먼저 그는 자신의 사별한 아내가 준 넥타이를 불태웠다. 넥타이는 흔히 남근의 상징물로 여겨진다. 이 행동은 테디가 타인의 팔루스를 버리는 동시에, 자신의 목을 조르던 아내의 환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낸다.

 

영화 <셔터 아일랜드>의 한 장면. 넥타이에 불을 붙이는 테디.


테디가 넥타이를 불태우기 이전에도 등대로 향하는 길을 순탄치 않게 만든 요소가 있었다. 테디는 셔터 아일랜드 절벽에 있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 레이첼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나오는 레이첼 역시 테디가 만들어낸 환각이며 테디의 망상을 더욱 깊어지게 만드는 인물이다. 우뚝 솟은 등대가 새로운 팔루스를 의미한다면, 동굴은 반대로 여성의 성기를 상징한다. 테디는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듯이 동굴 속에서 퇴행을 겪는다.


영화 <셔터 아일랜드>의 한 장면. 동굴 입구로 기어 올라가는 테디.




주체 = 결여 = 욕망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테디는 결국 참된 치료의 장소인 등대에 도착한다. 테디는 그곳에서 진실을 직면하게 된다. 수사관이라고 생각했던 자기 자신은 사실 셔터 아일랜드 정신병원의 환자였고, 아내를 죽인 범인은 자기 자신이었다. 그리고 3명의 아이들은 아내가 살해했으며, 아파트에 불을 지른 것도 조울증이 있었던 아내의 소행이었다. 이러한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테디는 정신병을 앓게 되어 셔터 아일랜드에 입원한 것이다.


테디 다니엘스라는 주인공의 이름은 사실 앤드류 래디스의 스펠링을 섞어놓은 것이었고, 실종자 레이첼 솔란도의 이름도 부인인 돌로레스 차날의 스펠링을 섞은 것이었다. 레이첼 솔란도의 메모에서 등장한 '4의 규칙'은 바로 이러한 아나그램을 의미한다.

 

영화 <셔터 아일랜드>의 한 장면. '4의 규칙'을 설명하는 코리 박사.


앞서 말했듯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주체(Subject)는 곧 결여이고 틈이다. 그리고 주체의 틈(/)은 기표(Signifiant)의 결여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별문제 없이 언어를 사용하지만 언어 자체엔 근본적인 결함이 존재한다. 만약 S1이라는 단어가 있다고 쳐보자. S1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S2가 필요하다. 그리고 S2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S3이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가면 언젠가는 시작점인 S1으로 돌아오는 순환논리적 속성이 나타난다. 사전에서 '조작'을 찾았더니 '주작'이 나오고, '주작'을 찾았더니 '조작'이 나오는 셈이다. '4의 법칙'은 이러한 언어의 순환논리를 암시한다.


라캉의 원환면.


라캉은 이러한 기표(S)의 속성을 뫼비우스의 띠로 나타냈으며, 3차원적으로는 원환면(torus)으로 나타냈다. 원환면은 기표의 사슬(S1→S2→S3→Sn)이 나선을 그리며 표면을 만들고, 원통의 가운데는 텅 비어있다. 이 텅 비어버린 공간이 바로 빗금(/)이자 욕망, 그리고 주체를 의미한다.


주인공 테디가 등대를 찾아갔을 때 그는 나선형의 계단을 뛰어올라간다. 그러나 등대에서 찾은 진실은 견디기 힘들 만큼 잔인했다.


영화 <셔터 아일랜드>의 한 장면. 등대 위로 올라가는 계단.




치료의 실패


주체의 텅 비어버린 결핍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상징계로 진입하지 못한다. 주인공 테디의 환각증세 역시 그 결핍을 채우려는 미성숙한 시도다. 셔터 아일랜드의 의사들은 테디를 치료하기 위해서 그의 환각에 맞장구를 쳐주는 희대의 연극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 끝에 진실을 마주한 테디는 자신이 앤드류 래디스이며 아내에 대한 죄책감으로 환각에 빠져있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치료가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정신과 의사인 코리 박사는 테디가 이전에도 치료된 경험이 있었으나 금세 환각을 보는 증세가 재발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한번 더 재발이 일어나면 테디의 지나친 폭력성으로 인해 전두엽 절제술을 시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에 테디는 더 이상 진실을 피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듯 코리 박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러나 잠시 후, 잔디밭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테디에게 파트너 척(실제로는 시한 박사)이 접근하자 테디는 "이 섬에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라고 말하며 다시 환각증세를 보인다. 이에 의사들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테디를 수술실로 끌고 가도록 지시한다.


수술실로 끌려가기 직전 테디는 척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괴물로 평생을 살겠나? 선량한 사람으로 죽겠나?" 이 대사로 미루어볼 때 테디는 진실을 직면하고 치료될 가능성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자신 속의 결핍을 인정하지 못하고 환각 속으로 퇴행하는 길을 선택한다.


영화 <셔터 아일랜드>의 한 장면. 테디가 척에게 마지막 말을 전한다.


어쩌면 테디의 치료 실패는 예견된 것일 수도 있다. 테디가 의사들의 집무실에 갔을 때 유심히 본 그림 중에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 '느부갓네살'이 걸려있었다. 느부갓네살은 구약 성서 중 예레미야서에 등장하는 신 바빌로니아의 왕이다. 그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을 따라 야훼에 대한 신앙을 가졌으나, 이내 자만심에 빠져 타락하게 된다. 성서는 그 타락한 모습이 마치 짐승과 같이 추했다고 묘사한다.


라캉에 따르면 상징계는 곧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곳이다. 상상계 속에서 어머니와 함께 머무르던 인간에게 상징계는 몹시 불편한 곳이다. 그러나 그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인간은 상상계에 묶인 채 정신적 퇴행을 겪게 된다. 영화 속에서 테디가 보았던 느부갓네살의 그림은 아버지(신)의 법을 받아들이지 못해 퇴행하게 된 자신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 '느부갓네살'.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는 법


영화는 마지막으로 등대를 비추며 끝이 난다. 테디에게 새로운 팔루스가 될 수 있었지만 실패한 곳. 테디의 마지막이 안타깝지만 그의 선택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는 것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라캉은 우리가 주체의 결핍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그 빈자리를 채우려고 멀끔한 이미지를 꾸며내지만 그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조금 더 자라면 사람들은 타인의 인정을 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타인조차도 답을 알려줄 수는 없다. 주체(S)에 결핍이 있듯이, 타자(A)에게도 결핍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아야 하며, 스스로의 언어로 그것을 써내려가야 한다. 비록 그것이 결코 순탄치 않은 일일지라도.


영화 <셔터 아일랜드>의 마지막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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