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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역뿌리 Sep 16. 2017

#56 <더 테이블> 어긋남의 단상

오전 11시와 오후 2시 30분 

* 본 글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전 11시와 오후 2시 30분 에피소드는 묘하게 닮았다. 두 에피소드 모두 남녀의 어긋남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 어긋남의 양상은 사뭇 다르다. 



영화 <더 테이블> 스틸컷. 오전 11시, 셀카를 함께 찍는 두 남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좀전의 반가운 인사와 달리 두 남녀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둘은 오랜만에 보는 사이인 듯하다. “우리가 친구는 아니었지” 라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잠시 멈칫한다. 과거 연인사이였던 두 남녀가 재회하는 자리다.

불편하면서도 반갑기도 한 그 자리.

 

누구나 한 번쯤 뜨겁게 사랑했던 전 애인의 소식이 궁금한 적이 있을 것이다. 두 남녀 또한 내심 반가움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고 나온 듯하다. 연예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장소로 나온 여자와 근무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느긋한 남자, 그리고 둘 사이에 놓인 테이블. 이와 같은 설정에 관객들은 오묘한 설렘을 기대한다.   

     

그러나 대화는 흐를수록 애초에 서로 기대한 바가 다르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여자가 마시는 에스프레소와 남자가 마시는 맥주의 관계가 그렇듯이 두 남녀 사이의 간극은 좁혀지기는커녕 이물감만 든다. 남자는 여자에게 연예계 뒷말을 물어보거나 여자의 성형을 확인하는 등 눈치없는 행동만 연발하고 여자는 불편하지만, 쿨하게 이를 받아준다.

     

두 남녀의 어긋남은 함께 셀카 찍는 장면에서 절정에 달한다. 방긋 웃는 남자와 달리 여자는 당장이라도 경련이 일어날 것만 같은 미소를 짓는다. 이 자리를 통해 남자는 직장동료들에게 여자가 그의 전 애인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조금이나 기대를 했던 여자는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이내 단념한 듯 나갈 채비를 한다.

     

멜로의 작법대로라면 이 자리는 애틋함이든, 아쉬움이든 어떤 형태로든지 ‘서로를 그리워했다‘는 명제가 담긴 감정을 품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전 애인에 대한 향수보다는 시간이 흐른 뒤 변화한 상대방에 대해 궁금증만 있을 뿐이다. 상대방의 감정이 어떠한 지는 상관이 없다. 시간은 흘렀고, 사랑이 부재한 현실에서 멜로에 나올법한 설정은 그 서사처럼 흐르지 않는다.             




영화 <더 테이블> 스틸컷. 


해가 중천으로 넘어가면, 테이블에는 다른 온도가 등장한다. 오전보다 더 짙은 침묵과 긴장감이 흐른다. 시종일관 여자의 시선은 아래로 고정한 채 곁눈질로 틈틈이 남자를 쳐다본다. 남자는 여자에게 말을 건네고 싶지만 이내 어색한 듯 안절부절 못한다. 대화를 하고 싶지만 섣불리 용기 내어 말을 꺼내지 못하는 두 남녀는 호감을 가지고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한참 후에 만난 사이다. 잘 알고 싶지만 잘 알지 못하는 사이다.

     

두 남녀의 대화는 자꾸만 어긋난다. 같은 감정임에는 분명하지만 각자가 품고 있는 감정은 다르다. 하룻밤 사이에 손목시계만 놓고 돌연 사라진 남자에게 여자는 화나있다. 막 시작하는 사랑에 설렘과 기대를 안고 있었지만,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남자는 여행을 떠나버렸다. 심지어 한참 후에 나타난 남자는 영양가 없는 대화를 이어가더니 “경진씨 저 잘 모르잖아요” 라는 말을 내뱉는다. 다시 잘해보고자 나온 여자는 기가 막힌다. 그녀의 화를 더 부추기 위해 마련된 자리인 것만 같다.


영화 <더 테이블> 스틸컷. 


한편, 남자 입장도 마찬가지다. 과거 그의 충동적인 행동에 느끼는 미안함보다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여자와 만나는 자리를 굳이 마련했을 것이다. 용기 내어 만든 자리이지만, 막상 만나자마자 입 밖으로 새어나는 소리는 시시콜콜한 말이다. 말에 애정을 섞어보기도 하지만 성급하고 무례한 것만 같다. 그녀로부터 신뢰를 잃은 듯하다. 다시 서로 알아보고자 꺼낸 말에 그녀의 화만 북돋을 뿐이다.

     

두 남녀 모두 상대의 감정에 대해 확신이 없다. 핑크빛 기류는 흐르지만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듯한 두 남녀. 결국, 여자가 자리를 일어나려고 할 때 남자는 손목시계를 꺼내보인다. 애당초 그녀에게 주고 싶었던 선물이지만 눈치 보느라 주지 못했던 것이다. 여행 중 비싸게 준 골동품 손목시계를 매일 그녀를 생각하며 테입을 돌렸다고 말하는 그의 눈빛은 반짝거린다. 수줍은 듯 여자는 실소를 터뜨리며 두 남녀 사이에 온도는 따뜻해진다


계속해서 감정의 타이밍이 빗나가는 대화에 이 에피소드마저 어긋난 엔딩을 장식할 것만 같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오후 2시 30분 두 남녀의 엔딩은 해피엔딩이다. 앞의 에피소드와 지나간 사랑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지만, 테이블 자리에 가져온 남녀의 감정은 다르다. 여기선 두 남녀 모두 사랑을 가지고 왔다. 이미 어긋나있는 퍼즐이 한 사람의 솔직한 발언에 서서히 맞춰지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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