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시간에 이곳을 걸으면 새삼 이곳이 번화가가 아니라 주택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칠흑이 내린 연희동은 어둠 속에 도사린 까마귀처럼 고요하고 매혹적이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것은 하늘에 뜬 달이었으며, 달빛이 비친 간판 모서리나 건물 벽돌은 깃털처럼 윤기가 흘렀다. 그들은 그 흔적에 의지해 길을 걸어갔다. 서늘한 밤 공기는 확실히 어떤 마력을 품고 있었다. 조금씩 빠르거나 느린 걸음걸이 사이에 흐르는 은밀한 긴장감과 지나치는 가게에서 문이 열릴 때 새어나오는 여유로운 말소리, 웃음소리가 내일은 주말이고 오늘은 무한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이 미뤄왔던, 이제 헤어지든지 아니면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은 것에 관한 결정은 점점 이 밤을 허비하고 싶지 않은 욕망으로 돌변했다.
그녀가 걸음을 멈춰 서서 주영을 돌아보았다.
“집에 그냥 들어가긴 싫은데, 맥주 한 잔만 할래요? 좋은 곳 알거든요.”
그녀의 이름은 윤아였다. 그들은 펍에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 굴다리를 지나 연남동으로 걸어가면서도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했다. 목을 적시거나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 필요한 술은 주위에 전부 있었다. 그들은 괜찮아 보이는 간판과 불이 켜져 있는 실내 어디든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은 미끄러지듯 아래로 걸었으며, 곧 경의선 숲길에 도착했다. 길을 가로지르는 바람이 상쾌했다. 거대한 행렬을 이룬 사람들은 바람을 등지고 한 방향으로, 육지에서 물이 있는 쪽으로 걸었다. 행렬을 맞닥뜨린 그들은 신나하며 기꺼이 합류했다.
그녀가 말했다.
“내 인생은 단순해요. 걸어 다니고, 책을 읽고 웅크려서 잠을 자는 것뿐이거든요. 물론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어요.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했죠. 학교에 다니고, 대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동안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목표가 있었어요. 좋은 회사에 입사하거나, 아니면 그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을 한다든가 말이죠. 그러기 위해서 스펙을 쌓고 전공을 늘리고, 삶 대부분은 그런 것들로 차있었어요. 나도 한때 그랬었고요. 흔한 대학생. 주변이 온통 그런 사람들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3학년 때, 친구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가다 차에 치여서 죽었어요. 운전자는 70살이 넘은 노인이었는데, 악셀을 브레이크로 착각하고 밟다가 그만 도로로 침범하는 바람에 뒤에서 친구를 쳤다고 하더라고요. 전날까지만 해도 만나서 웃고 떠들다 헤어졌는데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진 거에요.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고요.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삶 자체에 회의를 가지게 된 건 아니거든요. 단지 그때야 타고난 본성을 알게 된 거에요. 신윤아는 이렇게 살도록 만들어진 거란 걸요. 사회의 훌륭한 톱니바퀴로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은 자랑할 만한 바가 못 돼요. 당신은, 주영 씨는 아까 하려던 말이 뭐였어요? 그 이야기 좀 해봐요.”
주영이 대답했다.
“전 하나에 집중을 잘 못 해요. 생각이 너무 많아서요. 하날 하면서도 이 생각, 저 생각 꼬리를 물다가 결국 어느 하나도 제대로 끝내질 못하죠. 그래서 한때 열렬히 좋아했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내가 정말 그랬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요. 제가 떠나보낸 것들은 다 그런 식이었어요. 이제 사랑이나 진심이란 게 뭔지 모르겠군요. 누군가를 안는 것보다 헤어져 혼자만의 공간으로 가는 게 더 행복하거든요. 전 아무래도 누구도 사랑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아니면 좀 멍청해지고 싶네요.”
어둠과 알코올의 힘을 빌려 겨우 말을 끝내자마자, 발가벗겨진 것처럼 창피함과 경멸이 밀려 들어왔다. 친구와 부모님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는 말이었다. 그는 윤아를 쳐다보았다. 윤아는 고개를 숙이고 다른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털어놓은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불쑥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주는 신뢰감도 있으니까. 아무튼 오늘은 너무 많이 마셨다고 생각한 순간, 주영은 불현듯 길 위에 그들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숲길에서 출발했을 때 요란하던 무리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들만이 홍제천 길을 걷고 있었다. 천이 흐르는 소리가 유일하게 이 상황이 헛된 꿈이거나 망상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그들은 가로등 빛도 거의 닿지 않는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서로 바라보았다. 그는 자꾸만 눈이 감겼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녀도 피로에 눌려 구부정한 자세로 있었고 주영은 그녀를 데리고 갈 수 없었다. 머리 너머로 자동차가 지나갔다. 주영은 눈에 힘을 주고 택시를 잡으려고 핸드폰을 꺼냈다.
순간 가슴에 윤아의 이마가 닿았다. 열병에 걸린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달라붙은 셔츠를 통과해 살갗으로 전해졌다. 주영은 그녀의 뒷머리를 끌어안았다. 순간 그들은 단지 행진하는 무리에서만 벗어난 것이 아니라 택시와 핸드폰, 강물이 흐르는 소리와 같은 모든 것에게서 한껏 멀어져서, 그들을 감싼 암흑 속으로 끝없이 굴러떨어졌다. 택시가 도착했고 그는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녀는 내내 죽은 듯이 앉아 있었고 집 앞에 도착해서 그들은 횡설수설하며 연락처도 물어보지 않고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