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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nokno Oct 2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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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가지고 태어난다. 주영은 처음 이 문구를 읽었을 때 스페인 탐험가들의 손길이 닿기 전 카나리아 섬 같은 의미로 이해했다. 사람은 제각기 다른 독특한 생태를 지닌 기계였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서로의 세계, 서로의 섬에 정박해 탐험하고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한편 외지인들은 땅을 밟고 걸으며 이질적인 토양과 씨를 뿌리내린다. 그것들은 떨어진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얌전히 자랄 때도 있지만, 무성하게 자라 섬의 토종들을 밀어내고 영역을 넓히기도 했고 심지어 섬 전체를 집어삼키기도 한다. 불과 네 달 전에 주영이 겪었던 일이었다. 윤정은 눈물 날 정도로 모든 면이 애틋했다.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감정을 표현하는 것마저도 전부 서툴렀다. 매번 만날 때마다 윤정은 이제야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에 차오르다가도 그 다음이 되면 또다른 곳에서 넘어지기 일쑤였다. 그녀와의 연애는 사랑보다는 부성애에 가까웠고, 윤정에게 주영은 연인보다 더 큰 존재였다. 그래서 서로에게 더 무조건적이었고 맹목적이었다. 네 달 전 종말을 고한 쪽은 그녀였다. 초봄에 내리는 비가 서늘했고, 그는 막막해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오히려 윤정이 서글픈 웃음으로 달래주었다. 삶은 제멋대로였고 가혹했다.


 윤정은 현실에서 사라진 뒤에도 얼마간 그의 무의식의 주인 노릇을 하려들었다. 장소는 항상 그녀의 집 앞이었다. 주영은 지금까지도 그곳에서 나눴던 대화들을 기억했고,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는 것만으로도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인내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듣고, 폭포처럼 쏟아지는 감정을 맞는 것뿐이었다.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우체국 직원이 문을 두드리는 것이나 전화 벨이 울리는 모든 것들이 그녀의 신호로 들렸다. 글을 쓰고 있을 때만 그것들은 잠잠해졌고 그의 마음도 가라앉았다. 그것이 글쓰기를 계속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글을 쓰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꿈도 드물게 꾸었고 간혹 꾸더라도 눈을 뜨면 흐릿한 기억만 남았다. 주영은 음울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과 가구가 보였다. 자신의 집이었다. 창밖으로 석양빛이 새어들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침대 끝에 걸터앉아 얼굴을 감싸쥐었다. 머리가 미친듯이 어지러웠다. 자는 동안 마치 TV 채널을 마구잡이로 돌린 것처럼 수십 가지의 꿈의 장면들이 지나쳤고, 그것들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서로 뒤섞여 있었다. 그중에 윤정도 있었다. 빨간 패딩을 입은 그녀는 자신의 집 담벼락에 기대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입가에 애증 섞인 미소를 띤 채, 잘 지내냐고 물었다. 그리고 우리가 처음으로 같이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았다고 했다.


“내가 한 말 기억나? 놓치면 안 되는 사람과 헤어지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떠올리면 무슨 생각이 들까 궁금하다고. 그 사람은 영영 돌아오지 않고, 아무도 그 사람의 역할을 해줄 수 없어. 그럼 남은 인생을 허비하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을까?” 주영은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영화의 장면을 떠올렸다. 불현듯, 여주인공과 윤정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잠이 깬 뒤에도 꿈속의 대화가 얼마간 잔상으로 남았다. 사람들은 치유하기 위해 너무 빨리 잊거나 혹은 대신할 것들을 찾아다니곤 한다. 그는 자신이 지금 그런 상황에 처해있다고 조금도 생각하지 없었다. 단지 그의 인생에 윤정이라는 인물이 너무나 비중이 크고 강렬했던 나머지, 피부에 흉터처럼 남아 무심코 쳐다볼 때마다 기억이 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행동은 ‘회복하기 위해서’ 가 아니라 본능에 따른 것일 뿐이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차가워서 들뜬 생각들이 일시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표면 위로 윤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침실 바닥에 벗어던진 옷들, 며칠 전 있었던 일들이 두서없이 지나갔다. 주영은 몸을 돌려 가방을 뒤졌다. 카페에서 그녀에게 빌려주었던 책. 마치 그것으로 그녀에 대한 관심을 갈음할 것처럼. 하지만 책은 없었다. 혹시 길을 걸어가는 사이 떨어트렸던가? 아니면 그녀의 가방 속에 있을까? ‘책을 가지고 갔다면 오늘 카페에 갔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 그곳에 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옷장에 있는 옷을 입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거센 충동이 그를 이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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