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은 바람에 몸을 맡기고 걸었다. 날씨가 우중충했고 길에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마주칠 때마다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한 손에 호신용 무기처럼 우산을 꼭 쥐고 있었다. 그도 오늘 저녁에 비가 온다는 것을 보았지만 우산을 가지고 나오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감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또 그치는 과정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인들이 비가 오기 직전에 무릎이 아픈 것과 달리 순전히 자신이 느끼고 경험한 것만을 토대로 판단하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아무튼 그는 그 감각에 따라 행동했고 예상한 결과가 나오면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점점 공기가 질어지고 있다고 느꼈으며 곧 비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가 온다면 어디에 피신할지 생각을 하려는 찰나, 이곳이 연희동이고 골목을 접어들면 단골 카페가 나온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걸음을 멈췄다. 그는 어디로 향할 생각이었을까? 처음 현관문을 나올 때는 분명 어디에 빠트렸는지도 모를 책을 찾기 위해서였다. 아마도 홍제천으로 가서 도로를 쓸고 다니며 있지도 않은 책을 찾느라 고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남동의 어느 골목에서인가, 그의 어떤 마음, 스며나온 열정이 그를 다른 목적지로 이끌었다…
주영은 카페 앞으로 가까이 걸어갔다. 피어오르는 인센스 연기를 보자 다시 그녀가 떠올랐고, 감기에 걸리지 않았는지, 지금쯤 일어났을지 궁금했다. 아니면 혹시, 주영은 계단을 조금 내려가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전등이 켜져 있었고, 직원들이 카운터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선은 그보다 조금 더 안쪽, 그들이 앉았던 구석 테이블을 향했다. 그곳에는 한 연인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주영은 창문에서 눈을 뗐다. 종업원이 문을 열고 나오다가 그를 향해 인사했다. 주영은 무뚝뚝하게 그를 쳐다보고는 등을 돌려서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다 마침 위에서 내려오던 사람과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윤아가 웃음을 참는 듯이 쿡쿡거렸다. 미처 표현되지 않은 감정들이 얼굴로 번졌다.
“지금 왔어요? 저도 늦잠 자느라.”
순간 주영은 속으로 되물었다. ‘우리가 오늘 다시 만나기로 했던가?’ 아니, 그녀가 택시를 내릴 때까지도 그런 말은 한 적 없었다. 단지 어딘가 기록된 사실처럼 새벽녘에 헤어지고 난 뒤에 몇 시간이 지나 이곳에서 다시 만날 운명이었다. 사랑은 불행한 열정이 틀림없었다. 주영은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가라앉히느라 있는 힘껏 애를 써야만 했다. 체크 무늬 셔츠를 입고 그물로 짠 가방을 멘 그녀는 눈앞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흐린 햇살이 등 뒤를 비추었고, 주영은 지하와 고독 대신 그녀를 데리고 옥상의 정원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윤아가 물었다.
“그런데 왜 나오는 길이었어요? 혹시 자리가 없어요?”
주영이 대답했다.
“깜빡하고 노트북을 안 가지고 왔거든요.”
“정신이 없으시네요. 근데 저도 그랬어요. 나올 때마다 잊어버린 게 하나씩 생각나서, 몇 번을 집에 들어갔다 나왔는지.“
윤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부끄러움과 체면이 입을 틀어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무절제하고 천박한 웃음, 이보다 더 폭력적인 신호가 있을까? 사랑도 이것에 비하면 우정이나 증오, 슬픔과 마찬가지로 강력하지 않다. 그녀는 주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장난기 많아 보이는 커다란 눈으로. 그도 윤아를 똑바로 바라보려고 애썼다. 방금 들은 말을 잊어버릴 정도로. 그녀의 표정들, 혹은 어떤 손짓들은 그의 내면을 깊숙한 곳까지 찌르는 데가 있었다.
“그리고, 여기.”
윤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한 손을 내밀었다. 주영이 어제 빌려준 책이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홍제천을 돌아다니면서 눈으로 바닥을 쓸지 않아도 되었지만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어젯밤은 기억이 하나도 없어요. 근데 가방에 이 책이 있더라고요. 어제 빌리고서 안 돌려드렸었죠. 오늘 나오면서 혹시나 해서 가지고 나왔는데, 정말 만났네요.”
주영이 대답했다.
“저도 집에 와서 알았어요. 덕분에 이번 주말에 열심히 읽을 수 있겠군요.”
“다음에는 그 책 이야기해요. 또 만나면요.”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라고 말을 끝맺은 그녀는 계단을 올라가 그가 걸어왔던 길로 향했다.
그녀가 뒤돌아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윤아가 사라지자마자 주영은 건물 지붕 아래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내리는 빗줄기를 보면서 그녀가 약속 장소로 뛰어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윤아는 자신의 삶이 단순하다고 자조했지만, 도시의 분위기와 대중들의 태도, 혹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 자유를 지나치게 누린 나머지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들도 그녀의 시간이 몇 년 전에서 더이상 흘러가지 않는다고 느낄 정도였다. 윤아는 그것을 책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녔고, 주영은 그녀를 동경했다. 확실히 그는 자유에 대한 결핍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