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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라

by knok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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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이 되어서야 이 영화를 보았다. 제목을 처음 보았던 건 작년 11월 경 막 개봉했을 무렵이었는데, 아마 상을 받기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연희동에 있는 라이카 시네마에서 볼 영화를 찾다가 이 영화를 클릭해 줄거리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소재도 그렇거니와 아무래도 정치적인 내용이 연상돼 다른 영화로 눈을 돌렸다.

아노라를 다시 떠올린 건 작년 예술상 수상작들을 찾아보고 있을 때였다. 황금종려상의 수상작이 이 영화라는 것을 알고 왓챠피디아에서 감상평을 찾아보았다. 수상작에 어울리는 글과 평론가의 시적인 한 줄이 마음을 잡아끌었고, 몇 달 전과 달리 소재도 흥미가 갔다. 놀랍게도 개봉한 지 몇 달이 지난 뒤인데도 라이카 시네마에서 아직 상영중이었다. 황금 종려상의 힘일까? 나는 바로 다음 날 표를 예매했다.


영화는 꽤 재미있었다. 혼자 팝콘을 먹으면서 편하게 보기에는 말이다. 눈이 즐거웠고, 각 처한 인물들은 처한 상황에서 짐작에 크게 벗어나지 않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결말 또한 그랬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부모님이 오신다는 말에 도망친 반야를 찾기 위해 길거리를 전전하며 벌어진 촌극이었다.

인물들은 시종일관 심각한 표정을 지고 있었지만, 멀리서 보면 모든 것이 희극적이었다. 도로 위에서 남자 세 얼간이 중 한 명씩(주로 가닉)은 바보짓을 하고 있었고, 이고르는 얼빠진 표정으로 가만히 있거나 서투르게 애니를 배려하다가 잔소리를 듣고, 토로스는 그동안 쌓인 불평을 쏟아내다가 애꿎은 젊은 무리에게 꼰대 같은 말을 던지는 등, 마치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은 기껏해야 하룻밤 동안의 해프닝일 뿐이고 조금만 지나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결말은 이튿날 이혼이 성사되고 애니와 그녀의 짐을 옮겨주라는 지시를 받은 이고르가 집 앞에 도착한 뒤, 애니가 그에게 안겨 참아왔던 울음을 터트리는 것으로 끝난다. 영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돈과 욕망, 권위적인 상류층의 모습을 깨닫고 그동안 주변에서 자신을 묵묵히 지켜봐 주었던 사람을 발견하는 거라고 하면 좋을까? 그러나 어딘가 내가 놓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러지 않으면 이 서사는 단순했고 클리셰적인 면이 다분했다. 감독은 황금종려상 인터뷰에서 '모든 성 노동자들에게 이 상을 바친다' 고 했으나, 애니가 성 노동자인 설정이 작품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으로 기능했는지는 의문이다. 성 노동자이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는 지점, 혹은 발생할 수 있는 사건들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만약 그녀가 공장이나 음식점 서버였다면 기존의 서사와 많이 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처음 만남의 방식이 조금 다를 뿐 반야의 제안을 수락하면 그 뒤로는 35mm 필름을 잘라 그대로 갖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다. 그렇다면 감독은 성 노동자에게가 아니라 모든 매력적인 서민층 여성에게 바쳐야 하는 것 아닐까란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노동자가 영화에 꼭 필요한 부분이자 주제 요소이고, 영화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녀들이 겪는 이야기가 특이성을 지닌다고 생각해 보자. 그 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관객이 성 노동자에게 공감하고 고유한 서사로 인정받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몇 가지 도덕적, 윤리적 장벽이다. 사람들이 성 노동자에 대해 가지는 생각 중 대부분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에 대한 인식과 존엄성을 침해한다는 점과, 다른 노동과 비교했을 때 정당하고 인정받을 수 있냐는, 소위 신성함이라 불리는 가치에 대한 의심이다.

첫 번째로, 그녀가 훌륭한 직업 윤리를 가지고 성실하게 삶을 살았다는 진술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느 직업이든 그녀와 비슷한 환경에서 삶을 열심히 일구어나가는 사람들은 많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성 노동자가 다른 직종에 비해 유별나게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열악하여 비교하는 관점에서 보정이 필요한가? 그렇지 않다. 만일 필요하다고 해도 그것은 바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 윤리의 근본적인 지점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고, 이것은 윤리의 대대적인 전복이 일어나기 전에는 바뀌기 어려운 부분이므로 결국 불합리하거나 부당하지 않다. 애니는 자유의지로 이 직업을 선택했고 그에 따라 잠재된 세간의 인식과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한 인간으로서 겪은 고통에 연민을 가질지언정 '성 노동자' 로서의 고충으로는 특별히 유난스러운 반응을 보내줄 수 없다.


두 번째로 '1만 5천 달러' 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액수는 하룻밤을 보내고 직장으로 떠나려고 하는 애니를 붙잡고 일주일간 자신의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이반의 말에 그녀가 역제안한 금액이다. 오랜 고민 없이 내뱉은 그녀의 대답이 의미하는 것은 그녀가 이미 자신의 성의 가치를 환산해보았다는(즉 이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는)흔적과 스스로 남성(혹은 사회) 권력에 예속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을 남긴다. 이것은 오히려 자본 이념에 매몰되어 왜곡된 욕구를 가지고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 잘못된 방향을 추구한다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자본이 모든 것들의 위에 있는 세상이라고 해도, 인류가 지금껏 존재해오면서 유지하고 발전해온 정신과 윤리를 위반하면서까지 자본을 추구하는 것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체제는 사회가 작동하는 원리일 뿐, 그 안에서 스스로에게 적합한 방향을 찾아 나가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다. 스트립 클럽에서 고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과 성을 판매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고 팔듯이 '단순히' 여성이 섹스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남성이 받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 않는가? 애니가 아무리 부정해도 반야 일가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로부터 창녀라는 딱지를 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음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진심에 대해서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반야와 애니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변질되었던 간에 진심으로 사랑해서 결혼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반야는 미국 영주권을 얻기 위해, 애니는 그의 일가의 돈이 탐나 의도적으로 '결혼 계약' 을 했다기보다 말이다. 다만 둘의 차이는 반야는 일주일 정도가 지나고 금방 식어버렸고, 애니는 변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보통은 반야 쪽으로 인간 쓰레기다. 인성이 어떻다고 비난의 목소리가 쏠린다. 물론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 부분에서는 이견이 없다. 다만 그러한 과정이 처음부터 진심이 아니었다는 확신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진심이라고 부르고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우선 표준국어사전에 따르면 사전적 의미는 '거짓이 없는 참된 마음' 이다. 오롯이 사전적 의미를 따르기만 한다면, 사실 우리는 매 순간 진심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특히 말이나 표정과 달리 마음에서는 참과 거짓이 공존할지언정 진심이 없는 순간은 조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전적 의미 외에, 단어에 어느 정도 조건을 붙여 이해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기간적인 조건이 있다. 영화와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애니를 일주일 남짓 동안만 사랑했던 반야는 진심이 없다(고 관객들에게 보여진다). 왜냐하면 반야의 감정의 형태는 '진심' 이라고 불리기에 일주일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혹은 환경적인 조건도 있을 수 있다. 스트립 클럽에서 만난 남녀는 썩 건강한 목적으로 바깥에서 만남을 이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반야는 애니의 매력적인 육체나 목소리에 끌렸다고 볼 수 있고, 반대로 애니는 반야의 재력에 끌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상대방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지닌 주변 요소들에 끌려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진심인가, 진심이 아닌가? 만일 아니라면, 그 뒤로 시간이 지나서 비로소 상대방 자체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때부터 진심이 되는가?


마지막으로 반야 일가에 대해서 이야기해본다. 작중 애니는 반야와 결혼한 뒤 그의 부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하면 둘의 관계를 설득시키고 스스로를 잘 보일 수 있을지 고민한다. 하지만 실제로 부모를마주쳤을 때 애니는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웃음과 인사를 건넸지만 어머니인 갈리아는 냉담했고 아버지와는 이야기하는 장면조차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뜻하지 않은 행운에는 그에 상응하는 반작용이 뒤따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애니가 반야를 만나 결혼까지 이르게 된 것은 분명히 엄청난 행운이지만 그 뒤에 찾아오는 것들은 당연히 감내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감내하지 못할 정도로 애니의 감정이 요동치거나 환경을 비롯한 외부적 요인이 압도한다면 그것은 도로 신 포도가 되어버릴 뿐이다. 후자의 경우 대표적으로 갈리아의 애니에 대한 모욕과 냉담함을 들 수 있는데, 이것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생각해 보자.

반야의 부모는 올리가르히로 불리는 러시아 재벌이고, 반야를 아버지의 기업에 들여보내서 일을 시키기 전 공부를 목적으로 미국으로 보낸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아들이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게다가 그 상대가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던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심정이 어땠을까? 애니가 어떤 얼굴로 어떤 말을 건네오더라도 그것을 차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수위를 점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조금 더 완화된 서사로 이야기해보자. 반야의 가정이 러시아의 일반적인 중산층이라고 가정했을 때 동일한 사건이 일어났다면 용인될 수 있는가? 중산층이 아니라 서민층이었다면? 반대로 애니가 성 노동자가 아니라 초고소득층인 의약계나 실리콘밸리 종사자였다면 이 사건은 용인될 수 있는가? 영화는 반야 일가와 애니를 자본의 기준으로 가르고 은연중에 관객에게 언더도그마적 인식을 심어준다. 마치 상류층이 하류층을 대수롭지 않게 막대하고 모욕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상류층의 이면을 꼬집는 것처럼 말이다. 애니의 입장에서는 인생 전체를 통틀어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들었다고 해도 언행에 윤리적 문제가 있을지언정 갈리아의 태도는 정당하다. 그녀는 애니의 시어머니로서, 반야의 어머니로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어른으로서 그럴 자격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니가 진정으로 반야를 사랑한다면 극복해야 할 지점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화를 내고 도망치면 그만이다.


감독은 이전에도 수 차례 성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왔으나, 이번 작에서는 그녀들에 대한 순수한 이야기보다는 정치적인 의도와 목적이 보이는 듯한데다가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이상적 낙관으로 매듭지으려 한 것이 본질을 흐린 것 같아 아쉬운 생각이다. 또한 직업인 성 노동자가 상징적으로 쓰였을 뿐 아니라 이반의 캐릭터성과 지위, 애니의 사회적 계층이 클리셰적인 도구로만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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