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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다샤 Aug 18. 2020

[세월호 6년, 생존자 인터뷰 ⑤]

난 가만히 있으란 말 거부하고 나왔지만, 떳떳하지 못하다





▲  제주시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 중인 이아무개씨.

ⓒ 변상철



이아무개(47)씨는 뱃일을 하다 친구 따라 화물차를 몰게 되었다. 그 역시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생존 기사이지만 그는 살아난 것 자체가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한다. 혼자 살아난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사는 그는, 오늘 하루도 304명의 목숨을 대신해 사는 부끄러운 날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차마 얼굴과 이름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 화물차 기사 생활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사실 저는 젊었을 때 뱃놈이었어요. 배를 많이 탔었거든요. 큰 배는 아니고 작은 어선이었는데 2008년 어느 날 친구가 화물차를 한다기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나도 따라서 그 화물차 기사로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제 화물차를 본격적으로 운전하기 시작한 건 친구 차량을 인수받아 타기 시작한 2011년도부터예요. 지금은 그 친구와도 금전 문제로 절교했지만요."




- 금전 문제는 해결하셨어요?


"아니요. 그 친구로부터 받을 돈이 많았는데 그냥 포기하고 살았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자립했죠. 차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안간힘을 쓰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참 제 인생도 기가 막히죠.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차량 할부를 다 갚은 날이 딱 4월 10일이었어요. 4월 10일."




- 2014년 4월 10일이요?


"네, 그렇죠. 2014년 4월 10일. 내가 화물차를 2008년부터 탔는데 친구로부터 화물차를 승계받은 건 2011년이었어요. 할부만 승계받으면 됐는데, 친구가 차액을 1000만 원 남겨서 중고매매로 돌려버렸어요. 그러니 결국 매매상 거쳐 1000만 원을 더 주고 사게 된 거죠. 그때 내가 실수한 것이 인감도장을 친구한테 줘버렸다는 거예요. 믿었으니까요. 진짜 죽마고우였거든. 그래도 말없이 할부 꼬박꼬박 갚아서 결국 2014년 4월 10일 모두 갚게 되었죠."




- 세월호는 어떻게 타게 되신 건가요?


"2014년에 소주 공장에 근무하고 있었어요. 화물차에 소주 상자 가득 채워서 4월 15일 제주항에서 목포로 갔지요. 육지 도착해서는 충북 청주에 소주를 내리고, 다시 서울 구로에 들르고 고양시도 갔었죠. 술 상자를 다 내리고서 화성에 들러 짐을 실었습니다."




- 그렇게 짐 싣고 바로 인천항으로 가신 건가요?


"네, 인천항에 좀 일찍 도착했어요. 그런데 날이 뭐가 내리려는 것처럼 흐린 거야. 여하튼 일단 차는 배에 넣어 놓고, 배가 고파 간식거리 찾으러 갔는데 안산 단원고 버스가 보이더라고요. 그 버스 보면서 아이들 수학여행 가는구나 생각했죠.




밥 먹으러 부둣가 바로 앞 식당에 들어갔어요. 배 채우고 막걸리 한 잔 먹고. 그리고 나와서 표 끊어서 배 라운지에 앉았는데 출항 번복을 두 번이나 했어요. 출항한다 안 한다. 나도 뱃놈 출신이라서 마라도 가파도 왔다 갔다 해서 아는데, 속으로 '안개 이렇게 끼었는데 왜 출항을 하지? 출항 힘들 것 같다' 싶었지요. 그때 우리 화물 선배님 중에는 삼천포로 운전해서 간다고 차를 돌린 선배들도 있었어요. 그런 차가 약 대여섯 대 됐어요."




- 왜 삼천포로 안 가셨어요?


"나는 바쁜 게 없었으니까. 기사들 나름대로 다 사연이 있었겠지만 난 막걸리도 한잔했으니 운전대를 잡을 수도 없잖아요. 삼천포면 장거리 운전이에요. 400km 넘게 운전해서 내려 가야 해요."



"왜 가만히 있어야 하나 싶었지"



- 배에는 화물 운전 기사 분들 쉬는 공간이 따로 있는 건가요?


"네. 대합실은 시간이 늦으면 난방을 꺼버리니까 추워서 라운지로 올라갔어요. 올라가니 학생들 몇몇이 있더라고요. 날씨도 우중충하고 추운데 배에서 보일러를 안 틀어주길래 승무원에게 담요를 좀 가져다 달라고 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담요 달라고 부탁했던 사람이 배 사고 났을 때 가만히 있으라고 안내 방송한 사람이었더라고요. 내가 애들도 춥고 하니까 담요 여분을 달라고 했는데 그 사람은 투덜거리기만 하고 결국 안 가져다줬어요."




- 세월호 참사 당일에 다른 화물 기사분들과 같이 계셨나요?


"오 대표(오용선 '제주세월호생존자와그들을지지하는모임' 대표)랑 기사실에 같이 누워 있었죠. 배 운항 시간이 예상 시간보다 많이 늦어졌어요. 아침 8시쯤에 배가 고파 기사실을 나와서 식당에서 밥 먹으려 하는데 오 대표는 없더라고요. 내가 1박2일 동안 씻지도 않고 있으니 내 몸에서 냄새가 났는지 기사들이 다들 옆에 없는 거야. 냄새난다고.(웃음)"




-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셨나요?


"화물 기사 중에 경기도 출신 형님이 하나 있어요. 그분이랑 8시 반경에 밥을 먹으러 나갔죠. 내가 선미를 바라보고 식당에 앉아 있는데 등 뒤에서 갑자기 쇳소리가 나는 거야. 그리고 식탁에 있던 묵사발 그릇이 확 기울었어. 순간 '어? 이거 배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그런데 안 돌아와. 복원되어야 하는데.




보통은 배가 흔들리면 그릇이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다시 다른 쪽으로 기울고 하는데, 복원이 안 돼서 사람들이 의자에 맞고 테이블에 맞고 난장판이었어요. 더군다나 차에 실은 컨테이너까지 다 떨어지고. 배가 난리 난 거야. 속으로 '아 이건 큰일이구나' 생각했죠. 같이 있던 형님한테 큰일 났다, 나가야 한다 그랬죠. 그래서 형님은 선수 방향의 왼쪽 출입구로 나갔고. 나는 본능적으로 저기로 나가면 더 죽을 것 같아서 거꾸로 갔어. 거꾸로 거슬러서."




- 그때 상황을 좀 더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내 기억에는 기울기가 30~40도 된 것 같았어요. 세월호가 1차, 2차, 3차에 걸쳐 기울었는데 방금 전 이야기는 제일 먼저 배가 기운 상황이었어요. 그때도 경사가 심했어요. 식당에 노래방 시설이 있었거든요. 마침 거기에 달린 마이크가 눈앞에 있더라고. 그거 잡고 나는 거꾸로 올라갔지. 그렇게 올라가서 상황 보고 좀 있으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을 하더라고. 왜 가만히 있어야 하나 싶었지."




- 나오고 나서의 상황을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때 동수 형님은 사람들 구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계셨고, 나는 그냥 멘붕이었어요. 밖을 보면서 배가 다시 중심을 잡으려나 생각했는데 그 순간 한 번 더 배가 기우뚱하니까 그때는 배가 복원 안 되겠다 생각했지. 그때가 마이크 줄 잡고 나오고 나서 40분쯤 지난 후였어요.



그리고 세 번째 기울고 난 후에 나는 헬기로 구조되어 나왔어요. 다른 형님들은 아래쪽으로 내려가 배로 구조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거꾸로 나와 구조를 기다리다 막 바다에 뛰어들 준비를 하려는 그때 헬기가 도착해 자리 하나 남는다고 해서 헬기를 타고 서거차도 거쳐 팽목항으로 이동했어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겠더라고요"



- 헬기를 타고 세월호를 바라보셨네요?


"헬기를 타고 위에서 세월호를 지켜보는데, 세월호 스크루 두 개가 보였어요. 완전히 뒤집어져서. 스크루 두 개를 보는 순간 내 감정이 순간 무너졌어요. '아 끝났다' 생각했어요. 그때 나도 모르게 깊은 탄식이 나오더라고요."




- 팽목항으로 이동하셔서는 어떠셨어요?


"팽목항에서 담요 하나 주고 버스 타고 진도체육관으로 이동했어요. 다행히 우리 제주 화물 기사 같은 경우에는 진도군수님 배려로 숙소를 잡을 수 있었어요. 진도체육관에 도착하니 누군가 와서 브리핑하는데 기가 차지도 않았죠. 현장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뭘 안다고 브리핑을 하는지. 오히려 진도체육관에서 CNN 기자를 보니까 아, 일이 커졌구나 하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 탈출 후에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후회가 됐어요. 세월호가 뒤집어진 그 시점에 나만 살겠다고 왜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했을까. 그런데 상황이 막상 닥치니까 솔직히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겠더라고요. 침착하게 행동했으면 몇 명이라도 구했을 텐데 그게 제일 안타깝죠. 세월호에서 나온 후에 그 생각이 계속 나요."




- 다음날 제주로 넘어오셨어요?


"배편으로 들어왔어요. 많이 힘들었어요."




- 세월호 참사에서 차도 바다로 가라앉았는데, 보상을 받으셨어요?


"자동찻값, 위로금, 보상금은 받았죠. 그런데 사고 이후로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5개월을 술만 먹고 방황하면서 보냈어요. 그러다 10월에 화물차를 신청했죠. 개인화물로.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요. 



그 차를 타고 지금까지 일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육지로 다니면서 화물차를 한 1년 다녀봤는데, 배를 탄다는 것이 불안하고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제주에 화물 자리가 있다길래 얼른 일자리를 잡아서 지금은 배 안 타고 제주에서만 화물 일을 하고 있어요."




- 생활은 어떠셨어요? 세월호 참사 전과 후가 차이가 있었나요?


"생활요? 좋아진 것도, 나빠진 것도 없이 근근이 연명합니다. 제주세월호피해상담소 가서 이런저런 교육도 받고, 미술도 하고, 오카리나도 배우고."



"304명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야"




▲  세월호 생존기사들과 나들이 나온 화물 기사들. 가장 왼편에 이아무개씨가 있다.

ⓒ 변상철




- 제주세월호피해상담소가 2015년도에 생겼는데 언제부터 다니셨어요? 도움이 되셨나요?


"제가 2017년도 후반부터 다니기 시작했는데 도움이 됐죠. 금전적으로도 도움 되고, 숨겨왔던 끼도 발견하고. 제가 재주가 없는 줄 알았는데 하면 잘해요. 너무 내 자랑인가 이거? (웃음)

오카리나 연주도 하는데, 이건 피해상담소에서 배운 것은 아니고, 차 타고 출근하다가 오카리나 연주 동아리 현수막을 보고서 스스로 찾아가 배웠어요. 세월호에서 나온 뒤 1년 동안 술에 빠져 살았는데 정말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면 안 되겠다 생각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그곳을 찾아갔어요."




- 세월호 참사가 6년 지났잖아요, 참사에 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내가 참 바보 같은 행동을 했구나, 어리석었구나,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적극적으로 아이들을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함이 많이 들죠. 자책감으로 술을 엄청 마셨어요. 동료기사들이 왜 너네만 살아 나왔냐? 너 뭐 했나? 현장에 없었으면서 이런 소리를 하는데 많이 힘들었어요. 지금은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이고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버티고 사는 것 같아요."




- 드시고 계시는 약이 있으세요?


"수면제를 먹어요. 솔직히 수면제를 먹어도 잘 깨요. 깊은 잠을 잘 못 자는 거죠."




- 6년 만에 '제주세월호생존자와그들을지지하는모임'(제생지)이 만들어졌는데 어떠세요?


"제가 떳떳하지 못하니까 그날의 아픔을 기억해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아요. 막연하게 국가를 대상으로 이야기하기도 그렇고 나 자신에게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도 언젠가는 달라지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그래도 매달 1만 원씩 후원하고 있습니다.(웃음)"




-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을까요?


"나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거부하고 나왔지만, 나온 뒤에는 누구도 구하지 못하고 생존 본능으로 나온 게 쪽팔리고 미안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럼에도 304명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들이 꿈꿨던 삶을 생각하면서. 나 같은 '모지리'가 그 삶을 대신 살 기회를 얻었으니까 열심히 살아야죠.

그리고 후대에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얘기를 해야죠. 해야 하는데 쉽지는 않네요. 또 한 번 사는 인생 멋지고 아름답게 살고 싶어요. 그리고 생존자와 함께 활동하는 '제생지' 사람들을 무조건 지지하고, 처벌해야 할 사람들을 꼭 처벌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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