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은 스토리 ⑤] 실낱같은 희망으로 진실 향한 싸움을 계속하다
▲ "재심을 신청합니다" 박상은
ⓒ 권우성
2019년 3월 22일 저녁 전화로 박상은씨가 풀이 잔뜩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변호사에게 전화를 받았어요. 재심 신청이 기각 되었다네요. 날 잡았다는 사람이 내가 북한으로 가려다가 잡힌 게 아니라고 하는데도 믿지 않다니 이런 재판이 어딨어요?"
그랬다. 3월 22일 서울중앙지법 서부지원 303호 11형사부(다)는 박상은씨의 재심을 기각했다. 이유는 적진 도주 미수를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없고, 불법감금이나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볼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어렵게 최두경이라는 증인을 찾아 진술서를 받고 문성씨의 녹취록을 제출했기에 충분히 재심이 열리리라 생각했다. 실제 박상은씨에게도 재심은 문제없을 것이라는 희망을 자주 말했기에 더욱 실망감이 컸다. 박상은씨에게 뭐라 위로해야 할지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나= 걱정하지 마세요. 곧바로 항고하도록 해요. 포기하지 말아요.
박상은= 항고한다고 뭐가 달라지려나? 이번 재판에서 할 수 있는 건 다했잖아.
나= 왜 할 게 없어요? 보안대에서 고문받을 때 만났던 문성도 증인으로 부르고, 처음 체포했다는 최두경도 재판에 증인으로 불러서 판사 앞에서 진실을 밝혀야죠. 법정에서야 다른 말을 못할테니까 준비 잘해서 포기하지 말고 싸움을 계속해야죠.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멍했다. 이렇게 준비했는데도 재심이 열리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나 절망감이 들었다. 일단 변호인과 연락을 했다. 변호인 역시 판사의 판결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곧바로 항고를 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보안대에서 일어난 가혹 행위를 입증할 문성씨의 증언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재판부가 증인신문 신청을 받아들였습니다"
▲ 항고심이 열리는 서울고등법원 403호 법정
ⓒ 변상철
박상은씨는 4월 1일 곧바로 서울고등법원에 항고장을 접수했다. '서울고법 제20형사부(다)'가 항소심 재판부다. 의견서를 제출한 뒤 곧바로 보안대에서의 가혹행위를 목격했다는 문성씨와 최초 체포자인 최두경씨를 증인으로 신청했다. 사실 재심개시 결정 전이라 재판부에서 증인신문 절차를 받아 줄 거라는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다. 며칠 뒤 평소에 차분한 서창효 변호사가 흥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재판부가 문성씨와 최두경씨에 대한 증인신문 신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신문기일이 6월 17일 오후 2시 서울고등법원 403호로 잡혔어요."
정말 실낱같은 기회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증인신문이 받아들여지긴 했지만 실제 문성씨가 증인신문 날 법정에 나와 줄지도 미지수였다. 강제력이 없기 때문에 본인이 나오지 않는다면 증인신문은 무산된다.
그리고 운명의 증인 신문이 찾아왔다. 박상은씨는 미리 나와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시민단체 '지금여기에' 사무국 주현우 간사와 서창효 변호사가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증인 최두경씨가 도착했다.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재판에서 진실만을 이야기 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정작 반드시 와주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바로 문성씨였다.
▲ 항고심재판을 기다리는 박상은의 뒷모습, 최두경, 변호인, 필자가 보인다
ⓒ 변상철
재판이 시작될 시간이 다 되도록 복도에서 기다리던 우리는 법정으로 들어섰다. 법정에서 판사가 들어오길 기다리는데 왼쪽 출입구쪽에서 회색 양복을 입은 한 노신사가 검은 가방을 하나 들고 들어왔다. 그때 박상은씨의 눈빛이 번쩍였다. 직감적으로 문성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가운데 자리에 홀로 앉아 박상은씨 쪽을 쳐다보지 않고 묵묵히 앞만 바라봤다.
판사가 들어오고 변호인과 피고인이 각자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검사가 출석하지 않아 약 10여 분간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도 검사가 들어오지 않자 판사가 10분 휴정을 명령했다.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결국 30여 분이 다 되어서야 검사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검사는 재판기일을 통보받지 못했다며 어수선한 행동을 하였다. 결국 30분이 지나서야 재판이 속개될 수 있었다.
먼저 피고인 박상은씨의 신분을 확인하고 두 증인의 신분 확인 절차와 증인 선서를 했다. 그리고 순서에 따라 최두경씨에 대한 증인 신문을 하였다.
변호인(이하 변) = 최초 어떻게 박상은과 마주치게 되었나.
최두경(이하 최) = 야간에 근무하고 있는데 밖에서 소리가 나길래 나가 보니 박상은이 있었다. 거리는 약 5~10m 정도였다. 길을 잃었다며 길을 알려달라고 하길래 일단 초소로 데리고 들어왔다.
변 = 박상은이 총을 들고 있었나.
최 = 총을 들고 있었다.
변 = 그때 체포하거나 검거하는 과정을 거쳤나.
최 = 길을 잃었다고 하길래 전혀 그런 과정이 없었다. 판결문에 체포했다고 되었는데 체포는 무슨 체포인가. 체포는 아니었다.
변 = 그 다음 박상은을 어떻게 했나.
최 = 내무반으로 데리고 가서 내무반에 있던 선임들 3~4명에게 인계하고 나는 다시 초소로 나왔다.
변 = 내무반으로 데려갈 때 체포하거나 결박상태로 데려갔나.
최 = 그런 적 없다.
변 = 이 사건으로 보안사에서 조사를 받은 적이 있나.
최 = 그런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조사받았는지는 기억이 없다.
변 = 이 사건으로 법정에 나간 적이 있나.
최 = 한번 나간 적이 있는 것 같다. 당시 법정이 서울 필동에 있었는데 나보고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라고 해서 그냥 예, 예하고 대답했다. 그런 분위기였다.
최두경씨의 증언이 끝나자 판사는 다음 증인이었던 문성씨를 증인으로 불렀다.
"내게 '정말 억울하다. 억울하다'는 말을 했다"
▲ 서울고법 재판정에 나타난 문성.
ⓒ 변상철
변 = 증인은 피고인 박상은을 언제 알게 되었나.
문성(이하 문) = 논산 훈련소에서 알게 되었다. 훈련병 번호가 서로 1, 2번이었고, 인천, 강화에서 왔기 때문에 서로 고향에 대한 동질감으로 가까워졌다.
변= 증인은 어디로 배치를 받았나.
문= 2군단 직할대 통신대대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변= 박상은을 다시 만난 건 언제인가.
문= 1969년 봄 쯤이었던 것 같은데, 당시 월남전쟁이 한창 때라 한국과 월남과의 직접 통신을 위해 통신부대를 차출해 춘천보안대로 보냈다. 그때 나를 비롯해 여러 명이 춘천보안대로 차출되어 갔다. 그때 그곳에서 박상은을 보았다.
변= 박상은을 만나게 된 경위를 말해달라.
문= 근무를 마치고 저녁이 되었는데 내무반장(보안대 소속)이 '네 동기가 여기 잡혀 왔다. 내려가 봐라'라고 해서 식당에 내려갔더니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던 박상은이 있어서 만나게 되었다.
변= 내무반장은 박상은과 증인이 동기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
문= (머뭇거리다가)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변= 이전에도 박상은에 대한 이야기를 부대원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나.
문= 물론이다.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
변= 증인이 2014년 통화할 당시 3일 정도 박상은과 함께 수갑을 차며 지냈다고 했는데 사실인가? (이때 녹취록을 법정에서 틀었다)
문= 3일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하루 이상 수갑을 차고 지냈던 건 확실하다.
변= 증인은 이 사건과 연관성이 있나?
문= 그런 일 없다
변= 그럼 증인이 수갑을 차고 피고인 박상은과 같이 감금될 이유가 없는데 어찌 된 것인가?
문= 내무반장이 명령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아마도 나와 함께 있으면 위로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변= 박상은 이야기로는 모진 전기고문, 구타 등으로 몸이 부어 증인이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었다는데 사실인가?
문= (머뭇거리다) 그건 기억이 없다.
변= 같이 있는 동안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나.
문= 밤중에 수갑을 찬 채 같이 화장실을 간 적이 있다.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아주 짧은 시간 박상은이 내게 '정말 억울하다. 억울하다'는 말을 했다. 그게 내가 들은 전부다.
변= 다른 말은 더 할 수 없었나?
문= 보는 눈이 많았기 때문에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변= 당시 증인과 피고인이 같이 자던 방은 어떤 곳인가.
문= 내무반이었는데 여러 명의 부대원이 함께 잤다. 우리처럼 통신부대에서 차출된 인원도 있고 건너 편에는 보안대 소속 군인들도 있었다.
한 시간이 넘는 증인 심문은 이렇게 끝났다. 판사는 이날의 심문을 판단해 재심여부를 판단하기로 했다. 다음 기일을 말하려 할 때 피고인이 마지막으로 할 이야기가 있다며 진술 기회를 달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