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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May 21. 2020

성실하게 뒤집힌 세계

144일 아가의 첫 뒤집기 성공

아이가 첫 뒤집기를 성공한 날 우연이겠지만 며칠간 계속되던 비가 그치고 날이 갰다.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란 색 위로 흰 구름이 걸린 하늘 같은 하늘이었다. 몸을 옆으로 돌려 밑에 깔린 팔을 처리하는 문제로 며칠을 끙끙대다 얼떨결에 팔을 빼는 데 성공한 아이는 두 팔로 바닥을 짚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머리를 번쩍 들었다. 눈에 보이는 풍경이 새로운지 신이 난 얼굴로 활짝 웃었다. 이제 바닥에 누워 올려다보기만 했던 세상과 똑바로 마주할 수 있다.


등을 대고 누워 있기만 했던 어제까지의 세계와 스스로 몸을 뒤집을 수 있는 오늘의 세계는 차원이 다르다. 뒤집기는 배밀이를 위한 준비 동작이고 배밀이는 기어 다니기 위한 연습이고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는 건 이동 능력을 획득했다는 뜻이고 이는 세상이 활짝 열린 것과 같다.


뒤집기를 위해 발끝까지 힘을 쓴다


어제와 오늘이 별 차이가 없는 성인의 삶에 아이가 생기자 새삼 시간의 흐름을 체감한다. 시간이 일을 하긴 하는구나? 시간은 속싸개 안에서 가만히 누워만 있던 아이를 움직여 고개를 돌리고 발을 차고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뭔가를 잡게 만든다. 무의미하게 휘젓던 손이 어느 순간 나를 향해 뻗는다. 반사적인 발버둥이 목적을 가진 동작으로 의미화한다. 나는 이제 내 나이가 헷갈려 허둥거리지만 아이가 살아온 날은 하루하루를 일일이 헤아린다. 서른과 서른셋은 별 차이가 없지만 태어난 지 14일 된 아이와 140일 지난 아이는 시선을 두는 것부터 다르니까.


생각해보니 서른의 나는 네가 없었고 서른셋의 나는 네가 있구나


백일이 지나고부터 아이를 바닥에 눕히면 등을 새우등처럼 아치를 만들며 몸을 뒤틀어 뒤집기 준비 동작을 시작했다. 그 모습이 나이키 로고와 같아 웃었다. 그래, 승리의 여신상 날개를 따라 몸을 펼쳐 날아오르자...! 하지만 승리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한 달 넘게 아이는 등을 휘고 옆으로 눕고 팔을 뻗고 두 다리를 들어 옆으로 내려놓는 반동을 이용하고 손으로 바닥을 짚어 버티는 등 뒤집기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몸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제대로 움직이는지 끊임없이 시험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인생 첫 스마트폰을 산 날을 떠올렸다. 몇 주나 기다려 받은 아이폰 4s는 작고 검고 매끈했다. 떨리는 손으로 액정 보호 필름을 붙이고 미리 목록을 만들어 둔 각종 어플을 깔아 사진은 잘 찍히는지, 와이파이가 잘 잡히는지, 낯선 기능들을 시험하고 연습했다. 아이폰을 가지고 내일로 여행을 떠났던 첫날 나는 더 이상 길을 잃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제 나는 지도 어플이 깔린 최신 기계를 손에 쥐고 있었다. 겁 없이 혼자서 해외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것도 스마트폰이 선사한 마음이었다.


세계를 손에 넣기 위해 일단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어야 하고 걷기 위해 자신의 몸을 통제할 줄 알아야 한다. 몸을 사용하는 첫 연습으로 뒤집기에 열중하며 아이는 숨을 몰아쉬고 침을 흘렸다. 몸통을 중심으로 두 팔과 다리가 서로 호응하며 조화롭게 움직일 수 있는 능력, 협응력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크로스핏을 하면서 오로지 내 힘만으로 턱걸이에 성공한 첫 순간을 기억한다. 약간 모자란 등 근력을 보완하기 위해 하체 반동을 활용해 코어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차 올리면 몸이 위로 솟는다. 잠깐이지만 철봉 바 위로 턱이 닿았을 때 너무나 신이 나서 활짝 웃었다. 무겁기만 한 내 몸뚱이가 조금이나마 중력에 저항하고 위로 날아오르는 데 성공했다, 내 힘으로! 이 순간을 위해 세 달 넘게 보조 밴드를 활용한 턱걸이 훈련, 하체로 반동 주는 법 연습, 코어를 단련하는 보조 운동에 매진했다. 고등학생 때 체력장을 하면 철봉 오래 매달리기에서 1초도 버티지 못하고 추락하던 어제의 세계와 턱걸이에 성공한 오늘의 세계는 공기부터 달랐다.


터미타임때도 세상 즐거워했다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던 몸과의 싸움에 처음으로 승리한 아이는 고개를 치켜들고 성공을 만끽했다. 좋아하는 장난감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팔과 다리를 날개처럼 파닥거렸다. 스스로 뒤집은 자신의 능력이  믿기지 않는지 눕히면 뒤집고 눕히면 또 뒤집고 계속해서 뒤집었다. 그 앞에서 같이 배를 깔고 엎드려 눈을 마주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시간은 착실하게 흐르고 우리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으며 계속해서 노력한다면 다른 세계로 떠날 수 있다. 철봉 위의 세계, 몸을 뒤집어 정면으로 응시한 세계, 성실하게 뒤집힌 세계는 먹구름이 걷힌 새파란 하늘처럼 거짓말 같은 풍경이다.


하늘같은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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