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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붱 Nov 12. 2019

축의금을 대하는 백수의 자세.

백수의 지갑은 열린다. 내 사람들에게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모두의 축하 속에 가정을 꾸리는 일, 결혼. 축하만 해줘도 모자란 누군가의 결혼 소식을 들을 때, 백수의 마음은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또 ‘돈 나갈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돈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돈’을 지불하면 먹을 수 있고 살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결혼과 같은 인륜지 대사에 대한 축하도 ‘돈’을 지불함으로써 표현하고 있다.


백수도 피할 수 없는
축의금 문화


언제부터 결혼식에 축의금을 내는 문화가 시작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이러한 축의금 문화에서 결코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아무리 버는 돈이 없는 백수라 할지라도.


물론 결혼식에 초대하는 사람이 백수인 나의 상황을 알고 있어서, ‘식권 따로 챙겨줄 테니까 넌 몸만 와서 축하만 해달라’고 얘기한다 할지라도 그런 말을 듣는 백수 속이 편할리 없다.


그렇기에 나의 한 달 최저 생계비에도 경조사비는 10만 원씩 고정비용으로 생각하여 계산해뒀다. 결혼식이 호텔에서 열리면 10만 원, 웨딩홀에서 열리면 5만 원 정도의 축의금이 적당하기 때문에 정한 금액이다.



첫 직장은 내가 29살에 퇴사했다. 그곳엔 나와 비슷한 나이의 여자 사원들이 제법 있었고 재직 기간 동안 매번 같이 점심을 먹으며 꽤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내가 퇴사하기 직전부터 하나둘씩 결혼을 하더니 퇴사하고 나서도 그들의 결혼 소식은 종종 들려왔다.


백수생활 초반엔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모아 놓은 돈이 제법 있으니 이런 찌질해 보이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문제는 한 달, 두 달, 반년씩 노는 기간이 길어질 때 들려오는 결혼 소식들이었다.


첫 회사에서 같이 점심을 먹었던 여자 멤버는 총 10명 정도 됐다. 그중에서 2명은 이미 결혼을 했고 나머지 8명이 미혼자였다. 솔직히 말해서 미혼자 8명이 전부 다 나와 친했던 것은 아니다.


몇 명은 나와 생각하는 것과 성격이 비슷해서 많이 친해졌지만 몇 명은 친해질 기회가 아예 없기도 했고, 속 깊은 대화를 나눠보지 않은 사람도 꽤 많았다. 한 마디로 친한 사람도 있었지만 더러는 데면데면한 사람도 있었던 거다.


그랬기에 이 멤버들 안에서 결혼 소식이 들려오면 고민됐다. 하루 2-30분씩 몇 년 간 같이 점심을 먹고 얘기를 나눴던 사람들인데 아예 모르는 사람인 척 안면몰수하는 것도 그렇고, 전부 다 참석하자니 내 생활비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회사를 다니고 있다면, 그래서 월급이 따박따박 들어오고 있는 상태라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도 않았다. 지금 쓰는 5만 원, 10만 원이야 다음 달 월급으로 메꿀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백수였다. 일정한 수입이 발생하기는커녕 일정한 비용만 따박따박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백수의 생계를 위협하는 축의금


한 달 총 60만 원으로 생활하는 백수에게 한 번에 5만 원 내지 10만 원의 비용을 내는 것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한두 번이야 용돈을 줄이거나 주유비를 줄이는 방법으로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다지만 이게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면 벌써 20만 원이 되고 30만 원이 된다. 한 달 생계비의 1/3 내지 절반 이상을 축의금으로만 쓰게 되는 셈이다.


마음이야 다 참석해서 축하해주고 싶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전 직장동료의 결혼 소식을 들을 때면 우선 그 사람과 나의 유대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됐다. 직장이라는 공통의 테두리를 떠난 지금부터 앞으로 1년 뒤에도 나는 이 사람과 단 둘이 따로 만나고 싶은지 아닌지를 상상해 보는 방식으로.


대부분 이 단계에서 경조사비를 챙기고 안 챙기고의 구분이 지어졌는데 간혹 그래도 좀 애매하고 판단이 잘 서지 않을 때는 내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상대방한테 도움받았던 일이 있었는지, 있다면 얼마나 나에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됐는지를 떠올려봤다.


앞으로 계속 보게 될지 어떨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동안 내가 상대방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감사한 일이 많다면 결혼식에 참석하지는 않는 대신 최소한의 성의 표시는 했다. 신혼집을 꾸밀 수 있는 탁상시계나 커플 머그잔 같은 생활용품을 선물하거나 신혼여행까지 다 치르고 돌아온 상대방에게 커피 한 잔이나 밥 한 끼를 사는 정도로.



백수는 모든 경조사에 참석할 이유도, 여유도 없다


그 정도면 그냥 결혼식에 참석하는 게 서로 덜 민망하고 좋지 않겠냐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식 갈 때 후줄근한 차림에 맨얼굴로 그냥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꼴로 가면 오히려 민폐다. 정성껏 화장도 해야 하고 머리도 만져야 하고 격식을 갖춘 정장이나 원피스도 필요하다. 이처럼 축의금 5만 원만이 결혼식 한 번 가는데 사용하는 총비용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기에 백수는 모든 사람들의 경조사에 참석할 이유도 금전적인 여유도 없다. 백수에겐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내가 먼저 챙기고 싶고 이어가고 싶은 인연은 스스로 알 수 있다. 돈 없고 힘없는 백수인 나에게도 먼저 연락하고 안부를 묻고 밥을 사고 커피를 사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들은 저절로 소중하게 여겨진다. 그들은 내가 돈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나 자체를 좋아하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요즘도 나는 누군가의 결혼 소식을 들으면 그 사람과 나의 유대관계를 떠올려본다. 앞으로 1년 뒤에도 이 사람을 보고 싶을까? 혹은 내가 그동안 이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던 적은 없나? 이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이 하나라도 나온다면 나의 지갑은 열린다. 충분치는 않아도 최소한의 성의 표시는 할 수 있을 정도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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