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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E May 22. 2024

영화는 예술이다

2017년 '영화의 이해' 과제

 영화는 예술일까, 아닐까? 과거, 수많은 지식인들은 영화가 예술이라는 의견에 반대해왔다. 영화는 카메라를 통한 현실의 기계적 재현물일 뿐, 창작자가 능동적으로 창조해내는 예술품이 아니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예술의 대표적인 예시는 회화였다. 회화는 현실을 주제로 하더라도, 그 현실은 작가의 시선과 붓질을 통해 재해석되는 것이었다. 지식인들은 영화에는 그런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이 영화는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루돌프 아른하임의 “<필름film>에서의 발췌”는 그런 주장을 체계적으로 반박하는 글이다. 나는 이번 과제를 통해, 그의 주장을 차근 차근 요약 정리함으로써, 영화 또한 분명히 창작자의 능동성이 반영된 예술임을 밝히려 한다. 또한 스콧 맥클루드의 “홈통 속에 흐르는 피”를 통해 두 글이 유사하게 전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내고자 한다. 이 글의 경우 만화를 다루는 글이기는 하다. 하지만 영화와 만화 모두 만들어진 이야기에 덧붙여진 이미지의 나열이라는 점에서는 유사성을 가지며, 자세한 내용은 이후에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살펴볼 글은 “<필름film>에서의 발췌”이다. 앞서 말했듯, 이 글은 영화가 단순한 현실의 기계적인 복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예술인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영화 또한 창작자의 감각이 개입되어 현실을 재해석하는 예술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그 이유를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카메라는 그냥 놓여지지 않는다. 지식인들이 영화를 예술이 아니라고 폄하하는 이유는 영화가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과정은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카메라를 놓는 것은 영화 제작자이다. 그리고 카메라를 어느 곳에 어떻게 놓느냐에 따라 우리가 영화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확연히 달라진다. 


  둘째, 조명의 문제이다. 관객은 완성된 작품만을 보기 때문에 영화 뒤편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겠지만, 조명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조명은 어떤 대상이 선명하게 보일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하며,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도록 돕기도 한다. 만일 영화 촬영에 조명이 없었다면, 우리는 깜깜한 밤에 분위기 있는 장면을 찍는 일 같은 것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영화 제작자의 체계적인 설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셋째, 화상의 한계이다. ‘화상의 한계’란 프레임 안에 갇힌 영화가 가지는 시각적인 한계를 의미한다. 한계라는 말은 부정적인 워딩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사실 화상의 한계는 영화가 예술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결정적인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우리의 눈은 앉은 자리에서 고개만 움직여도 공간의 전부를 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어떠한가.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은 인간의 시야에 비하면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로 인해 영화 제작자는 세계의 무한성으로부터 무엇을 보여줄지 결정해야 하는 선택의 의무를 가지게 된다. 달리 말하면 이는 선택의 기회이다. 여기서 또 영화 제작자의 능동성이 한 번 더 발휘되는 것이다. 이는 첫 번째 이유로 언급한 카메라의 위치 설정과도 큰 관련을 가진다. 무엇을 보여줄지 선택을 하고 난 다음에 할 일은 카메라를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제작자는 이런 화상의 한계라는 특성을 활용해 자신이 중요시 생각하는 사물을 부각시키기도 하고, 중요치 않은 것은 생략하기도 한다. 그렇게 효율적으로 내용을 전달하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한 이런 특성을 활용해 영화 제작자는 재밌는 트릭을 부리기도 한다. 영화 <인형의 집>에 어떤 방이 보이다가 갑자기 거대한 손이 들어와 그 방이 인형의 방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은 화상의 한계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예이다.


  마지막은 공간-시간의 연속성의 결여이다. 영화는 현실 세계와 달리, 시간과 공간의 비연속을 허용한다. 러시아에서 발전하여 지금은 세계 각국에서 영화의 일반적인 작법으로 쓰이고 있는 몽타주는 상이한 시간과 상이한 장소에서 발생한 상황들의 숏을 함께 연결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는 화상의 한계 못지않게 영화가 예술이 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몽타주를 통해 연결되지 않았다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을 영상 조각들이 영화 제작자의 감각과 손을 통해 연결되면서 다른 의미를 창조해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영화도 제작자가 무한한 현실의 소재 속에서 선택과 생략의 과정을 거듭하여 현실을 재해석하여 만들어낸 창작물로서, 하나의 예술로 받아들여질 근거가 충분하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영화가 예술로서 가치를 지니기에는 부족하다는 비판은 끊임없이 들어왔다. 영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은 침묵을 영화예술의 가장 큰 결함으로 표현했다. 이는 무성영화시대에 지속되어온 비판이었다. 현실을 재현하면서도 소리는 없는 영화가 답답했던 것일테다. 그러나 앙드레 바쟁은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침묵은 영화예술의 결함이 아니라, 장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무성영화가 현실 세계에서는 청각적 요소로 들려질 것들이 시각적인 요소로 재현되면서 오히려 영화 제작자와 관객의 창조성을 자극한다고 말한다. 제작자는 말로 했을 때 설명적인 것으로 그칠 이야기들을 시각적인 요소로 표현하느라 창조성을 사용하고, 관객은 그 의미를 해석하고자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는 직접적인 표현보다 간접적인 재현이 모든 예술 분야에서 총애를 받는 수단이 되는 만큼, 영화에서 침묵은 결함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스콧 맥클루드의 “홈통 속에 흐르는 피”에서는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앞서 언급된 영화가 예술이 될 수 있는 이유와 흡사한 이유로, 만화가 단순히 산문 문학과 시각 예술의 조합이 아닌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임을 주장한다. 앞서 나는 앙드레 바쟁의 주장을 간추려 말해 현실 소재의 선택과 생략이 영화를 예술로 만든다고 말한 바 있다. 만화도 그렇다. 영화처럼 영상도 아니고, 분절적인 이미지의 연속으로 존재하는 만화에서 선택과 생략의 분제는 더욱 부각된다. 


  이 글은 “<필름film>에서의 발췌”보다 조금 더 친절하다. 그래서 만화가 분절적인 이미지의 연속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속에 담긴 숨겨진 이야기까지 읽어낼 수 있는 이유까지 밝혀준다. 부분을 보면서, 전체를 읽어낸다. 이것은 ‘완결성 연상’으로 불리며, 우리가 만화나 영화와 같은 예술 작품을 접할 때 적극적으로 일어나는 작용이다. 이는 효율성을 위해서도 존재하지만, 스콧 맥클루드는 이런 생략이 의미 있는 이유는 독자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글의 제목인 “홈통 속에 흐르는 피”의 ‘홈통’은 만화의 칸과 칸 사이의 간격을 이른다. 그는 칸 속의 이야기는 작가의 몫이지만, 홈통 속의 이야기는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예시를 든다. 살인을 벌이는 장면을 만화로 그려내면서 살인을 시도하는 움직임과 결과만 칸 속에 보여줬다면, 독자는 그 장면을 상상하면서 살인을 벌인 공범이 된다고 말한다. 이런 만화의 특성은 독자 또한 수동적으로 이야기를 수용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주체로 참여하게 됨으로써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만화 또한 영화처럼 작가의 선택과 생략을 통해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것이다. 게다가 만화만이 가진 ‘홈통’은 수용자들의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는 효과를 주기 때문에, 만화는 다른 예술과는 다른 독자적인 예술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두 사람이 다루는 소재가 다른 만큼, 기술적인 측면에 대한 이야기는 다르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인한 각종 생략들이 오히려 그것들의 예술성을 높이고 있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이 뜻을 같이하고 있는 것 같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영화란 지루한 부분이 커트된 인생이다.” 이 말은 영화에서 생략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남의 하루를 잠깐도 빼놓지 않고 영화로 만들었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재미가 없겠는가. 우리는 현실의 기술적인 복제물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영화가 그렇지는 않지만, 울림을 주는 영화는 분명 현실을 아주 정성스레 손질해 놓은 것일테다. 그리고 그런 영화는 분명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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