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의 첫 기억은 이렇게 시작한다
The sunset’s longer
해가 오랫동안 지고 있어
Where I am from
나는 어디에서 온 걸까
Where dreams go to die
꿈이 죽는 곳은 어디일까
While having fun
한창 즐기는 동안
깜깜한 방 안 울리던 음악. 해가 오랫동안 지고 있다. 해는 계속 지고. 끝없이 지고. 나는 왜 이렇게 된 거지? 더 깊이, 더 깊이, 나는 어디에서 온 거지? 터질 것 같은 머리를 견디지 못하겠어서. 울면서, 책상에 머리를 묻고, 약을 먹으면서.
노래의 첫 기억은 이렇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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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전으로, 더 전으로. 다시 처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진단 나왔네요. 루푸스예요. 환자분은 루푸스입니다. 밖에서 산정특례 등록하고 가세요.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책자를 준다. 루푸스를 위한 도움말. 엄마와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쫓기듯이 진료실 밖으로 나와 간호사가 건네는 종이에 서명을 한다. 건강보험 산정특례 등록 신청서. 암과 희귀난치성질환, 두 개의 체크박스 중 건네받은 종이에 체크되어 있는 희귀난치성질환이 눈에 띈다. 한 달의 발열과 피로와 발진과 통증에 대한 진단이 내려진다. 이렇게 허무하게도. 옆에서 엄마가 갑자기 뚝뚝 운다. 엄마를 안아 준다. 집에 와서는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라면을 모두 가져다 버린다. 밀가루와 술과 커피를 끊는다.
더 앞으로, 더 앞으로. 재작년에 루푸스를 진단받았는데요…… 힘겹게 서두를 꺼내는 사람이 있다. 친구들의 연락을 피하는 것도, 행복하거나 행복하지 않았던 과거를 반추하는 것도, 다 지겨워서 제 발로 병원에 찾아간다. 예전에 견딜 수 있었던 것들을 지금은 견딜 수가 없어요. 밤에 자려고 누워 있으면 통증이 느껴지는데 그게 힘들어요. 공부를 하면 과거의 제가 자꾸 떠올라요. 몸이 아프니까 공부를 잘 못하고요. 그게 아픈 건지 게으른 건지 분간이 쉽지 않아서 자책하게 돼요…… 약을 받으려고 데스크 앞에 서 있는데 모든 게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버스 타고 오는데 해가 저물고 있다. 부연 풍경이 평화롭다고 생각한다.
공부를 때려치우고서 얼떨결에 회사를 다닌다. 통근길 지하철에 몸을 싣다가 문득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퇴근하고 쏟아지는 잠을 못 이기는 날들이 많아진다. 이렇게 사는 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가끔은 울고 가끔은 오래 자고 또 아주 가끔은 응급실을 간다.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손에 쥔 채로. the sunset’s longer…… 노래가 흘러나오는 이어팟을 귀에 꽂은 채로 병원으로 입장한다. 어떻게 오셨어요? 심박수 모니터에서 들리는 일정한 소리를 들으면서 링거를 맞는다. 의사가 오면 병증을 읊는다. 몇 년 전에 루푸스를 진단받았는데요, 로 시작하는 이야기. 이제는 아주 많이 말해서 너무 뻔한 이야기. 이제는 루푸스 때문인지도 잘 모르겠는 이야기들. 링거를 다 맞으면 아침 해를 맞으면서 동생과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엄마는 또 운다. 나는 이제 잘 모르겠다. 모르겠는 나를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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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좋아하는 사진이 아주 많다. 직접 찍은 사진들을 하나씩 보정하면서. 내 의도대로 색들이 변하는 게 좋았다. 짙푸른 청색, 선명하고 눅진한 노란색, 햇볕을 받아 따뜻해진 나무의 녹색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좋았다.
Suburbia는 고향에 대한 노래다. 나는 사진을 보면서 지구상 곳곳의 고향들을 추억하고…… 잃어버린 고향들을 슬퍼하면서 노래를 듣고…… it seems I’m never letting go of suburbia, 난 절대 내 동네를 잊지 못할 거야. 잊히지 못한 동네들은 내게로 와서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건 지금의 내가 아니야. 그럼 진짜 나는 어디 있지? where I am from. 나는 어디에서 왔지? 누구도 모르는 정답. 애초에 정답 없는 문제에서 헤매고 있다면, 내 두고 온 과거들은 어떻게 하지? 과거는 신기루 같아서, 잡으려고 하면 사라진다. 해는 지는데, 자꾸 내 안에서 죽는 것들이 많아진다. 사진들은 모두 다 짙고 선명한데. 적절하게 크롭을 하고, 온도와 색조를 조정하고, 명부를 내리고, 암부를 높이면 엉망인 것 같던 사진들도 다 살아나던데. 그런데.
슬퍼지고 싶을 때 노래를 듣는다. 그럼 아주 오래전 그때의 내가 되었다가, 지금의 내가 되었다가, 떠다니면서 침잠하는 내가 있다. 이런 날도 있겠지. 그러나.
이런 날의 사진들도 채도를 높이고 암부를 높이면 그럴싸한 사진이 된다. 혹은 그럴싸한 내가 될 것이다. 노이즈와 반점을 숨긴채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럴싸한 내가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