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맑은 바다를 바라볼 때면 시간이 잠시 멈춰버리듯, 우연히 올려다본 가을 하늘에 눈을 떼기가 힘들 듯 블루 음악은 몇 번을 반복해도 그 안에 머무르고 싶은 평온함을 준다.
오늘 아침도 그랬다.
감은 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깊은 평온 속에서 눈을 뜬 순간 인어공주가 떠올랐다. 2년 전 나의 꿈!
꿈속에서 나는 신문을 보고 있다. 배우 이하늬가 죽었다는 기사다. 화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큰 컬러사진도 함께 실렸다. 이하늬가 형형색색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 바닥에 쓰러져 죽어 있는 사진이다. 파도가 이 배우의 왼편에서 조용히 밀려왔다 되돌아갔다 한다. 그 모습이 마치 인어공주 같다. 반짝이는 드레스 때문일까? 정말 그녀의 다리가 물고기처럼 보인다.
남편에게 이 뉴스를 얘기해준다. 마음이 너무 허전하다. 이제 정말 저 배우를 볼 수 없는 건가?
내 안에 이하늬가 있다니! 정말 영광인걸. 그런데 내 안의 그녀가 2년 전 꿈에서 죽었다. 인어공주로 변신한 채. 그녀가 원래 인어공주였던 걸까? 너무나 감쪽같이 사람으로 위장해서 그녀가 죽을 때까지 몰랐던 건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인어공주' 이야기를 좋아하는가?
사실 난 이 동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기에 세상의 모든 새드엔딩이 싫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블루가 가져온 나의 꿈을 보며 '인어공주가 정말 새드엔딩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사실 해피엔딩 아니야?'
어느 날 우연히 바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보게 된 멋진 왕자님. 갑자기 큰 파도가 밀려와 왕자가 탄 배가 전복되어 모두 물에 잠긴다. 인어공주는 왕자를 구해주고 바다로 돌아간다.
그 왕자님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인어공주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무시무시한 바다 마녀에게 찾아간다.
인어공주 "사람이 되고 싶어요."
바다마녀 "그럼 너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나에게 주렴."
인어공주 "사람만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요!"
바다마녀 "대신 조건이 있다."
인어공주 "말씀해주세요.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바다마녀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하면 너는 물거품으로 사라지게 된다."
인어공주는 무서웠지만 왕자를 못 만나는 게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것보다 더 끔찍했기에 바다마녀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주고 약을 사 온다. 물고기 모양의 하체를 사람의 다리로 만들어 줄 약을.
드디어 사람의 모습으로 왕자를 만난 인어공주! 하지만 왕자는 이 벙어리 여인이 자신을 구해준 사람인 줄도 모르고 다른 여인을 생명의 은인으로 착각한다. 게다가 그 엉뚱한 여인과 결혼 할 결심까지 한다.
왕자가 그 엉뚱한 여인과 결혼을 하는 순간 인어공주는 물거품으로 사라져 버리게 된다! 위기의 순간 바다 마녀에게 달려간 인어공주의 언니들이 동생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 칼로 왕자를 죽여. 그러면 네가 살 수 있어."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내 꿈에서는 이하늬가 죽었으니 왕자는 살았겠지.
그런데 이게 왜 해피엔딩이냐고?
꿈에서 누군가 죽는 건 그 사람에게 투사한 나의 모습을 나의 것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이니까. 왕자를 죽였어도 해피엔딩일 테고, 내가 죽기로 결정했어도 해피엔딩이 되는 꿈속의 동화.
인어공주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첫눈에 반하는 사랑, 이건 대부분 자신의 아니마/아니무스(남성 내면의 여성성/여성 내면의 남성성)를 상대방에게 투사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내 안에 그런 모습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걸 그 남자/여자에게서 본다.
'난 저 사람의 이런 모습이 좋아'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모습은 당신의 모습이다. 아직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뿐.
현실이 우리의 이런 투사를 상대방에게서 조금씩 벗겨낼 때 우리는 이런 말을 한다.
"당신 변했어." 혹은 "내가 미쳤지. 완전히 속았어."
하지만 상대방에게서 본 것은 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모습이니 그 사람은 변한 것도 없고, 속인 것도 없다. '내가 미쳤지'만 팩트다.
인어공주도 이걸 알게 된 게 아닐까?
'내가 미쳤지'
'내가 사랑한 건 이 남자가 아니라 나의 콩깍지였구나. 내가 반한 이 남자의 따뜻함, 배려, 지성, 리더십... 사실 다 내 모습이었구나.'
인어공주는 선택을 한다.
"언니들, 나는 이 왕자를 죽일 필요가 없어요. 내가 이 칼로 끊어야 하는 건 이 사람을 칭칭 동여맨 끈이에요. 그 끈을 꽉 쥐고 다니느라 손에 관절염이 생길 지경이에요. 내가 사랑한 건 왕자님이 아니라 왕자님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모습이었어요."
이 말을 하는 순간 인어공주의 몸이 물방울이 된다. 공기 중에 한 방울 한 방울 떠오르더니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인어공주는 바다와 한 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