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있는 존재의 그 어떤 무거움

참을 수 있다고 하여 가벼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by 코지

신년도 아닌데 때아닌 마음대청소로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여느 때와 같이 책장에서 책을 고르던 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발견하고 “이게 어떤 내용인지조차 기억이 안 나네”라는 생각이.


분명 읽었는데... 사놓고 몇 안되게 끝까지 다 읽은 쿤데라 책인데 무슨 내용이었더라 하는 생각과 함께, 몇 년 전 전해 들은 그 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아직 삼십 대 초반으로 어리다면 어린 나이였고, 아직 나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이라 그랬는지

소식을 들은 순간 머리가 멍해지며 생각했다. "왜 좋은 사람한테 그런 일들이 일어날까"라고.






이십 대 후반, 소개팅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나로서는 망설이다 탐탁지 않게 나갔던 자리.


거기에 그 애는 있었다.

삼각지 역사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나는 본의 아니게 삼십 분이나 늦었었고,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멋쩍게 인사하는 내게 그 애는 미소를 띠며 괜찮다고 말했다.


경리단길 근처 어느 카페에 앉아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고

대화는 잘 통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좋아하는 책이나 요즘 읽었던 책얘기를 하다가 나왔을 거다. 그 책 얘기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은 지 비교적 얼마 안 됐었던 나는 그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얘기했고,

그 애는 아 읽은 지 좀 되었는데 그런 부분이 있었냐, 다시 읽어봐야겠다라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이 요즘 읽고 있는 책이라며 내가 평소 관심이 없었던 일본 소설을 추천했다.


그렇게 몇 시간의 만남은 끝이 났고

우리는 어느 버스 정류장에서 조금 어색하게 인사했다.


몇 시간 후 그 애는 조심스럽게 장문의 카톡을 보내왔고

몇 번의 만남을 더 거쳐 아주 짧은 관계가 시작되었다.





후에 주변사람들이 내게 왜 헤어졌냐고 물어봤을 때 이성으로 보이지 않았다고만 상투적으로 표현했었지만,

사람 간의 사이를 좁혀가는 절차를 존중하고 마음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긍정적이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가치를 두는 것들에 함께 진심으로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내가 해온 것들과 앞으로 해나갈 것들을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말해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첫 만남 후 그 애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정말로 다시 읽어보았고


내가 정말로 교보문고에 들러 그 애가 추천해 준 일본소설을 사 읽었던 것은.



이승환 노래를 좋아한다고 하니 다음 만남 때 전곡을 다 추가해서 한 곡씩 들어봤다며, 자기가 가장 좋았던 노래는 이거라고 얘기해 주거나, 루시드폴 1집이 얼마나 명반인지에 대해 상기되어 얘기하며 '너는 내 마음속에 남아'의 가사를 함께 되짚어 보기도 했다.



자신이 길게 말을 보내면 나도 그만큼 뚱뚱하게 답장을 남겨주는 마음이 고맙다던 세심한 사람.


비록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길게 만나지는 못했지만,

양질의 시간, 대화, 그리고 공감과 존중을 기반으로 했던 마음은 어떤 형태로든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내 세계와 사고방식을 넓혀줄 수 있는 그런 만남이었다. 내게 참을 수 없는 존재는 분명 아니었지만 가벼운 존재 또한 단언 아니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참을 수 있는 존재의 무거움


참을 수 있고 없고 가 중요할까

한 사람의 영혼에 어떠한 인상을, 한 줄을 남겼다면.


내 버릇대로라면 분명 그 책을 읽다 감명 깊게 느꼈던 부분의 페이지 끄트머리를 살짝 접어놓았을 것이다.


오랜만에 한번 훑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