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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꼼지 Apr 12. 2018

아기는 엄마의 걱정을 먹고 자란다.

  아기가 생겼다는 걸 막 알았을 무렵, 지인의 유산 소식을 들었다. 오랫동안 아기를 기다렸던지라 많이 기뻐했었는데 7주 만에 아기가 떠났다고 했다. 그의 슬픔에 마음이 짠하면서도 한편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아기집만 확인했지 아직 아기는 보지도 못 했는데 우리 아기는 잘 있는 걸까? 6주가 되면 병원에 오라고 했지만 심장이 두근거려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무작정 병원에 찾아갔더니 의사가 초음파로 한참동안 배를 들여다보다가 아주 작은 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기 여기 있네요.”

  의사가 아기라고 말했으니 아기인 줄 알았지 내 눈에는 흑백화면 속의 작은 점이 초음파 노이즈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작은 점이 거기에 잘 있어줘서 나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 작은 아기에게서 일주일만 있으면 심장소리가 들릴 거라고 했다. 그렇게 긴 일주일은 처음이었다. 혹시라도 심장소리가 안 들리면 어떡하나. 그런데 병원에 가 보니 아기는 일주일 새 0.6cm의 올챙이 모양으로 자라나 있었다. 초음파 기계를 대니 “벌컥벌컥!”하면서 기차가 터널을 지나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콩닥콩닥도 아니고 벌컥벌컥이라니. 170bpm으로 뛰고 있는 아기의 심장소리를 듣고 있자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렇게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는데 괜한 걱정을 했구나.     


  아기의 성장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그렇게 작던 아기는 8주차에 1.8cm의 눈사람 모양이 되어 있었고, 12주차에는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4.5cm의 작은 사람으로 자라나더니, 16주차에는 벌써 손가락, 발가락이 다 생겨 엄지손가락을 쪽쪽 빨고 있었다. 아기가 이렇게 빨리 자랄 거라고는 진짜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아기가 건강히 자라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를 거라고는 더더욱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아기가 잘 지내는지는 병원에 가야만 확인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아기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으니 뱃속 아기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다른 엄마들도 나와 같은 심정인지 아기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계를 구입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심장소리로는 성에 안 찼다. 이왕이면 초음파 기계로 아기가 잘 있는지 보고 싶었다. 사실 인터넷에 슬쩍 검색해보기도 했는데 초음파 기계는 아무나 살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살 수 있다 하더라도 엄청 비싸겠지만.

  아기의 안위를 직접 확인할 수 없으니 몸이 조금만 달라져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입덧이 아기가 잘 있다는 증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는 조금만 속이 괜찮아져도 ‘아기가 잘 있는 걸까?’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갑자기 속옷이 젖는 느낌이 들면 혹시 피가 나는가 싶어서 화장실로 뛰어갔다. 아기를 가진 이후로 걱정 안테나가 24시간 돌고 있었다.     


  가장 큰 걱정의 산을 넘어야 했던 건 기형아 검사를 할 때였다. 12주차, 16주차에 피를 뽑아 기형아 검사를 하는데 병원에서는 고령 임산부라고 양수검사나 니프티검사 같은 정밀 검사를 권했다. 그런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그런 검사가 비싸기도 하지만 검사를 하는 자체에도 약간의 위험성이 따른다고 했다.

  한참을 고민했다. 정밀검사를 하고 마음을 놓을 것인가, 아니면 결과를 기다려볼 것인가. 만약에 아기가 건강한데 괜히 검사를 했다가 부작용이라도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또 만약에 아기에게 이상이 있다고 하면 그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온갖 ‘만약에……?’가 머릿속을 휘저으면서 마음이 너무 복잡해졌다.

  결국 우리는 정밀검사를 미뤄두기로 했다. 1,2차 기형아 검사에서 고위험군이 나왔을 때 정밀검사를 해보자. 그 전까지는 우리 아기를 믿어보자.

  그 믿음에 응답하듯이 아기는 모든 검사를 무난하게 통과했다. 목투명대 검사도 가뿐히 통과하더니, 피검사 수치도 좋게 나왔다. 기형아검사 역시 저위험군에 속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마치 대학 합격소식을 듣는 것처럼 기뻤던 것 같다. 그간 했던 모든 걱정들이 또 괜한 걱정들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원래 그렇게 걱정이 많은 스타일이 아니다. 살면서 커다란 관문을 통과해야 할 때에는 어떻게든 잘 되겠지, 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만약 잘 안 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밀려오는 불안감을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다행히 인생에서 내가 넘어야 했던 산들은 대부분 열심히 노력하다보면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이었다. 최선을 다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내게는 더 좋은 게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세상에 겁날 게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자식 문제는 달랐다. 노력해 보다가 안 되면 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나와 인연을 맺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존재가 잘 지내는 것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면서 나는 걱정 많은 여자가 되어버렸다.  


  그제야 평생 나를 따라다니던 엄마의 걱정이 생각났다. 엄마는 다정하지만 걱정이 많은 성격이어서 이십대의 나와 갈등이 많았다. 성인이 된 딸에게 얼토당토 않은 통금시간을 들이밀기도 하고, 약속이 있다고 나가려고 하면 누구랑 뭘 하러 가는지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나는 사춘기 때도 안 하던 반항을 이십대에 몰아서 했다. 땍땍거리며 대들기도 많이 대들었다.

  “다른 엄마들은 안 그러는데 엄마는 왜 그래!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

  그러지는 말걸. 내가 엄마가 되려고 하니 그 때 엄마가 왜 그렇게 걱정을 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뱃속에 24시간 넣고 다니는 아기도 잘 있는지 이렇게 걱정이 되는데, 세상 밖에 내놓은 딸이 걱정되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삼십년이 넘도록 엄마의 마음을 몰랐는데 제 자식이 생기고 고작 네 달만에 엄마를 이해할 것 같다니 옛말 틀린 게 하나도 없다. 너도 너 같은 자식 낳아봐야 엄마 마음을 알지.

  엄마의 걱정이 나를 이렇게 키웠는데 내가 잘나서 큰 줄 알았다. 아마 우리 아기도 자라면서 내 속을 썩이겠지. 그 때는 그냥 그렇게 생각해야겠다. 내가 엄마 속을 썩이면서 엄마의 걱정을 먹고 자랐듯이, 우리 아기도 그렇게 자라는 거라고. 그 때 너무 속상하면 나도 그렇게 말해줘야겠다. 이놈아, 너도 너 같은 자식 낳아서 키워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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