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광활한 우주, 무한한 거품 속 수많은 기포 중 하나에 불과한 나이지만,
그 수많은 기포 중 하필 너라는 한 기포를 만났다는 운명.
시작은 그저 주어진 운명이었지만, 모든 것을 모든 곳에서 한꺼번에 경험할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진다 해도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엄마와 딸, 그리고 가족이라는, 필연적인 애증의 관계
조이, 너라는 돌이 나락으로 떨어지더라도, 그런 너를 외면하고서 더 멋지고 결함이 적은 네가 있는 다른 우주에서 살 수 있더라도, 끝까지 너를 선택해서 나락이라도 함께 떨어져 보겠다는 것이, 그게 에블린의 선택인 거야. 고개만 살짝 돌리면 모든 게 부질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고개만 살짝 돌리면 그 모든 좌절과 실패가 켜켜이 쌓여 만들어낸 내 우주를 외면할 수도 있지만, 그 자그마한 고갯짓을 만들어내는 대신, 우주의 주사위가 굴려내서 던져진 보잘것없는 이 운명을 받아들이고 이곳에서 좌절과 실패라도 함께해온 사람들과 계속해서 그 좌절과 그 실패를 함께 겪으며 이겨내겠다는 것.
그래서 에블린은 자신이 돌의 상태로 살아가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멀티버스에서 조이와 마주했을 때에도 운명을 거스르는 선택을 한다. 조이는 '돌이니까 움직이면 안 된다'라고 말하지만, 에블린은 규칙 같은 건 없다고 말하며 조이에게로 조금씩 다가간다. 그 어떤 불가능이 에블린 앞을 막아선다고 해도, 에블린은 자신의 딸 조이와 함께하기를 선택할 것이니까. 그리고 마침내 그런 에블린에게서 도망친 조이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을 때, 에블린은 기꺼이 그와 함께 추락하기를 택한다. 추락이라도 함께해주겠다는 것이 에블린이고, 딸과 엄마의 관계라는 것이니까.
에블린과 조이가 닮아 있다는 것 또한 결국은 필연적인 상황처럼 느껴진다. 그 시꺼먼 베이글을 보고 조이와 똑같은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에블린이라는 것을, 조이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건 결국 조이의 간절한 도움을 원하는 목소리였는지도 모른다. 시꺼먼 베이글을 통과해 정말 끝을 맞이해 버리고 싶다는 조이였지만, 돌이 된 조이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실 그건 이 모든 삶이 부질없다는 자신의 말이 거짓이라고 말해줄 엄마라는 존재, 에블린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이 모든 게 사실은 아주 의미 있는 삶이고, 잘 살고 있다고 말해줄, 아직 어린 조이의 치기 어린 행위가 극에 달한 마음이었다. 자신의 부모님은 한없이 강한 존재일 것이라고 믿는, 나와 같은 것인 아주 절망적인 현실을 마주하고도 자신의 부모님은 어쩐지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다고 믿는, 그런 조이의 최후의 발악이었다. 그리고 에블린은 그런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또 그런 치기 어린 마음에 발맞추어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결국 에블린이 그 모든 버스 점프를 하고 '조부 투파키'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 또한 차마 딸인 조이를 고통받게 둘 수 없다는 하나의 감정에서 나온 일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에블린을 최후의 순간에서 도와준 것은 웨이먼드라는 점 또한 흥미롭다. 단순하게 웨이먼드 혹은 알파 웨이먼드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멀티버스 속에서 어김없이 에블린을 사랑하고 있던 모든 멀티버스의 한결같은 수많은 웨이먼드라는 것. 결국 에블린이 얻은 깨달음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웨이먼드였다는 것. 그 옛날 에블린이 첫사랑 웨이먼드를 따라나섰든, 각자의 길을 가다가 다시 만났든, 어떤 상황에서도 결국은 돌고 돌아 웨이먼드는 에블린을 사랑했을 것이라는 점은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의 대사 한 줄을 상기시킨다. 그 어떤 멀티버스에서라도 당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말하던 스티븐 스트레인지의 말을.
수많은 멀티버스 속, 최악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
우리가 영화의 시작부터 마주할 수 있었던 그 멀티버스 속 에블린의 삶 자체가 곧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처럼 느껴졌다. 모든 곳의 모든 일들이 에블린에게 한숨에 몰아치는 듯 에블린의 삶이 답답하고 목을 조여오듯 느껴진다. 그렇게 하나의 삶에서 몰아치는 일들에 정신도 없이 살아가던 에블린이 비로소 더 큰 세계를 마주하고 자신이 이 모든 멀티버스(everywhere)를 구할 모든 일들(everything)을 한꺼번에(all at once) 시도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에블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정말 그 일을 이뤄내기까지의 여정이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최악의 멀티버스 속 최악의 에블린이었지만 그렇게 최악으로 무능한 에블린이었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아름다운 모순.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가 에블린이고, 우리 모두가 치이듯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커다란 일을 해낼 그 한 명 한 명의 사람들임을, 이 영화는 깨닫게 해 준다. 모든 일을(everything) 모든 곳에서(everywhere) 한꺼번에(all at once) 경험할 수 있더라도 우리 자신이기를 택하고 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이니까, 우주가 얼마나 크고 그 큰 우주가 몇 개가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그 수많은 우주 모든 곳에서 모든 일이 일어나더라도, 지금껏 겪어온 모든 실패를 만회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실패를 딛고 선 지금 이 순간 이 한 곳의 나를 선택할 것이니까. 그 무수한 가능성 속에서 단 하나의 길을 선택해 만들어진 지금 이 순간 나의 모습이니까.
곳곳에 심어둔 일상의 철학
영화 속에서는 우리가 일상에서 한 번 정도는 해봤을 법한 생각들을 철학적으로 세밀하게 담아낸다.
그 일례로, '버스 점프'를 할 때 기괴한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삶의 이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엉뚱하고 색다른 행동을 시도해야만이 새로운 능력을 갖고 있는 멀티버스 속 자신에게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는 늘 색다른 행동을 시도해야만이 새로운 능력이 있는 가능성의 문을 열 수 있다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 운명과 선택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운명이란 주어진 것이고 선택은 스스로가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겉보기에 상반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 운명이라는 것 또한 결국은 수천, 수만, 아니 무수한 선택의 경우의 수에 따라 빚어진 것으로 비친다. 자그마한 일상 속 선택의 기로에서 다른 선택지를 택했기에 서로 다른 멀티버스로 분열이 된다. 결국 운명이라는 것은 태초의 시발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임을, 영화는 보여준다. 우리의 선택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것도 운명이라고 칭한다면, 결국 그 운명은 우리가 개척하는 것일 테니, 우주를 축소하면 인간의 뇌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똑같이 생겼다느니 하는 세간의 과학적인 말들은 아무래도 신경을 쓰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한낱 생명체의 뇌 속에 들어서 모든 삶이 조종되는 것일지 모른다고 해도, 아니면 또 어떤 모종의 사유로 우리의 삶이 실제로는 온전히 우리의 자의식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닐 수 있다고 해도, 그러면 어떠한가. 결국 그것 또한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것일 텐데. 이러한 방식으로 영화는 우리 개개인에게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 그에 따른 실패와 좌절, 혹은 성공, 그 모든 것이 아주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고 유쾌하고도 따뜻한 방식으로 넌지시 말해주고 있다.
결국은 돌고 돌아 변하지 않은 우리
엔딩에서 벡키에게 머리를 좀 길러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에블린의 모습은 영화를 보는 우리가 희미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그래, 그래도 에블린이구나. 우리가 보고 있는 게 정말 변하지 않은, 우리가 처음부터 보고 있던 그 멀티버스 속 에블린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기에, 그 많은 일들을 겪고 성장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저 우리 자신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성장한 것이지 그 옹골진 우리의 깊은 속 인물이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렇기에 이 모든 놀라운 일들을 겪고도 우리는 늘 그래 왔듯이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줄 것이라는 사실, 그것만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싸운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조금은 장난스럽고, 조금은 가벼워 보일 수도 있는 영화 속에 삶에 대한 철학, 삶과 인간관계라는 것이 주는 버거움과 그것을 다루는 삶과 싸우고 운명과 싸우는 현명한 방법을 풍부한 상상력을 곁들여 알려주는 영화. 싸운다는 건 사실 싸우는 게 아니라 사랑하고 품어주는 것이었다. 매일매일을 삶과 싸우고 주어진 운명과 싸워나가는 것이라고 말들 하지만, 그건 너무 피곤하지 않은가? 이 영화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해준다.
웨이먼드에게 '너처럼 싸우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말하는 에블린을 보고 있으면 영화 <썸머 필름을 타고!> 속에서 카린에게 "우리 승부하자!"라고 말하는 맨발이 떠오른다. 승부하고, 싸운다는 것이 결코 목숨을 내걸고 우리의 관계를 내걸고 결투를 하자는 것이 아닌 그들의 언어는 참 아름답다. 우리는 모두 사랑받을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승부로 보여주는 이 영화들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