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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기자 Jul 14. 2023

“예술 작품 없는 도시 찾습니다”

다미앙 풀랑의 캔버스가 전 세계 곳곳인 이유

AR·VR 기술을 활용해 작가들의 작품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미디어아트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MZ세대 역시 예술에 관한 관심이 기성세대 이상으로 높죠. 그러나 작가 전시회나 예술 관련 이벤트 대부분이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돼 있습니다. ‘6인치 미술관’ 기획 취재는 이런 간극을 실감형 콘텐츠를 활용해 좁혀보려 합니다. MZ세대에게 인기 있거나 업계에서 주목받는 신진·중견 작가의 작품과 작업실을 신기술을 활용해 다양한 시각으로 보여주어 예술 기사는 지루하거나 어렵다는 선입견을 깨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 앙제에서 태어나 기회의 도시 파리로

● 예술로부터 소외된 도시를 찾다

● 길거리 광고 포스터에서 받은 영감

● 기하학적 도형 그리는 이유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5월 13일 프랑스 파리 11구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난 다미앙 풀랑 작가. [지호영 기자]

올해 봄 서울 성북구 성북천 근처 골목에서 기하학적 도형이 그려진 4층짜리 주택에 시선을 빼앗긴 적이 있다. 주택 외벽엔 노란 삼각형과 연둣빛 사각형 등 층마다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밋밋하고 심심하던 골목 풍경에 생기를 불어넣는 듯했다.


5월 프랑스 파리 19구 한 골목에서 비슷한 그림을 다시 만났다. 프렌치 레스토랑 ‘몬 온클 르 비그네론(Mon Oncle le Vigneron)’의 셔터에 그려진 파란 삼각형과 사각형 등이다. 두 그림의 공통점은 회화·벽화·조형·집단 퍼포먼스를 넘나들며 공공 예술을 하는 다미앙 풀랑(Damien Poulain·48) 작가의 벽화라는 것이다.

셔터 작업에 적힌 작가의 서명. [지호영 기자]

다미앙 풀랑은 서울과 파리를 비롯해 일본·이란·세네갈·네덜란드 등 전 세계 구석구석을 캔버스로 여긴다. 한국에서 첫 작품을 선보인 건 2018년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타이포잔치 사이사이 2018-2019: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에서다. 이후 롯데백화점 리빙편집숍 ‘더 콘란샵’과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뮤지엄 등에서 그룹·협업 전시를 열었다.


그는 왜 벽에 그림을 그리는 걸까. 그리고 왜 도형일까. 궁금증을 풀고자 5월 13일 그의 작업실이 있는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수많은 벽화와 그라피티를 보며 ‘작가도 이런 거리 예술에서 영감을 얻었겠구나’ 지레짐작했지만 실제로 만난 그는 “예술적으로 척박한 환경에서 나고 자랐다. 길거리의 광고 포스터가 유일한 미술 교재였다”며 어릴 적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https://my.xrview.co.kr/show/?m=Zs75dbDZpZ5


삶의 순환과도 같은 공공 예술 순리

프랑스 어디에서 태어났나.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97㎞ 떨어진 앙제에서 태어났다. 상공업 중심지로 유명한 프랑스의 소도시다. 예술적으로 삭막한 도시였기에 길거리에 붙은 광고 포스터가 유일한 미술 교재나 마찬가지였다. 포스터 속 시각적 요소가 나를 예술가의 길로 이끌었다.”


공공장소에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전 세계 곳곳에 예술에서 소외된 지역이 있다. (거리의 그림은) 예술에 대한 열망은 있지만,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 공공 예술이 지역경제를 활성화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영향을 받은 광고 포스터들은 무언가를 팔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나는 팔지 않는 예술을 한다는 점이 재미있다.”


셔터에도 그림을 그리던데.


“셔터는 작업실이 없는 예술가에게 허락된 또 다른 캔버스처럼 느껴진다. (레스토랑이나 상점 같은) 공간에 생명력을 주고 싶었다. 그곳이 문을 닫았을 때는 공간이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이도록.”

파리 19구에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 ‘몬 온클 르 비그네론(Mon Oncle le Vigneron)’에서 만난 셔터 그림. 다른 사람의 그라피티에 의해 손상됐다. 왼쪽은 작업 초반

손상됐거나, 지금은 없어져서 더 는 볼 수 없는 작품도 있다. 공공장소에 작업하면 작품의 수명이 유한하다는 점이 아쉽지는 않나.


“삶의 순환과도 같다. 그림이 남아 있으면 기분이 좋고 감사하겠지만, 다른 예술가에게도 기회를 내줘야 한다. 탄생하고 없어지길 반복하는 게 공공 예술의 순리인 것 같다. 다만 개인적으로 의뢰를 받아서 작업한 그림은 대부분 보존이 잘 돼 있고, (SNS에) 사진을 찍어서 올리면 작품을 계속 간직할 수 있다.”


서울은 작가에게 어떤 캔버스인가.


“(도시 분위기가) 보수적일 것 같았는데 예상과 달라서 놀랐다. 높은 빌딩이 많고, 사람들의 움직임도 역동적이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예술에 관해 엄청난 열정을 보였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도시의 태동을 느꼈다. 앞으로도 다양한 작업을 시도해 볼 기회가 많을 것 같다.”


다미앙 풀랑의 작업실은 19세기 프랑스 예술가들의 중심 활동 지역이던 파리 11구에 있다. 철을 아코디언처럼 구부러뜨린 간판과 진한 초록색 대문, 문을 활짝 열어놓은 개인 레스토랑과 카페…. 골목은 개성적 에너지로 가득했다. 20대 파리지앵들은 가게 앞 길바닥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와인을 마셨고, 예술가로 보이는 사람들은 건물 앞에서 캔버스를 들고 바쁜 걸음을 옮겼다. 예술과 젊음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홍대 거리’나 ‘성수동’ 같이 느껴졌다.


기회의 도시, 파리


[+영상] 전 세계 벽과 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 다미앙 풀랑은 누구인가

작업실 문에 여러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던데.


“미디어 작업을 하는 예술가 7명이 함께 쓰는 작업실이다. 2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한 세대가 모여 있는데 그중 내가 나이가 가장 많다(웃음).”


작업에 집중하려면 혼자 쓰는 게 더 낫지 않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여러 관점을 접하는 것을 좋아해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사용하는 게 좋더라. 원래 19구에 작업실을 뒀다가 친구와 함께 작업실을 쓰고 싶어 11구로 이사 왔다. 2017년 파리에 오기 전까지 영국 런던에 있었다. 거기서도 8명이 작업실을 같이 썼다.”


왜 런던에서 파리로 왔나.


“런던은 현재 공격적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는 도시다. 런던에 14년간 있었다. 몇 년 단위로 계속 쫓겨 다니면서 점점 중심지에서 멀어졌다. 같이 작업실을 쓰던 동료도 같은 이유로 흩어지면서 외로워지더라. 그걸 계기로 파리에 오게 됐다.”


파리는 예술적으로 어떤 영향을 준 도시인가.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그런 기회가 많은 곳이다. 대도시에서는 디지털·사진 등 개인 작업하는 예술가를 만날 기회가 많다. 또 런던은 땅 자체가 커서 도시가 가진 잠재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파리는 어느 동네라도 30분 만에 이동할 수 있고, 구마다 다른 디테일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도형과 색으로 쓰는 시

다미앙 풀랑의 작품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요소는 기하학적 도형과 색이다. 다미앙 풀랑은 1994년 프랑스 오를레앙 디자인 예술학교(Orléans School of Art and Design)를 거쳐 프랑스 낭시 국립디자인학교(Ecole nationale supérieure d’art et de design de Nancy), 독일 슈투트가르트 미술대학(Staatliche 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 Stuttgart) 등에서 디자인과 비주얼커뮤니케이션을 8년간 공부했다. 그의 작업은 회화, 벽화, 조형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지만 타원·삼각형·사각형 등 도형을 배치한 그림의 형태엔 변함이 없다.


왜 도형을 그리나.


“내 작품이 보편적 언어를 지니길 원하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전 세계가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의 언어를 만들고 싶었다. (어느 도시나) 해와 산 모양이 같은 것처럼, 색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노란색은 빛을 상징하고, 빨간색은 피를 떠오르게 한다. 내 작업은 통용어로 시를 쓰는 것과 같다. 문자가 아닌, 도형과 색으로 말이다.”

2017년 제작한 조형물 ‘사원(Le Temple)’. [다미앙 풀랑]

첫 작품이 궁금하다.


“첫 작품으로 여기는 건 2017년에 만든 ‘사원(Le Temple)’이라는 조형물이다. ‘뉘 블랑슈(Nuit Blanche)’라는 예술 행사에서 선보인 토템 건축물이다. 19세기에 만들어진 프랑스 마옌의 한 교회 예배당 중앙에 설치돼 있다. 이 작품의 제작 방식을 바탕으로 (다음 작품을) 계속 발전시키고 있다.”

아프리카 세네갈의 애니 앤드 요제프 알베르스 재단(The Anni and Josef Albers foundation) 레지던시에서 만든 ‘좋은 아침(Walediam!, 2019)’

작품 중에는 소똥으로 만든 것도 있더라. 재료 사용에 거리낌이 없던데.


“소똥을 활용한 ‘좋은 아침(Walediam!, 2019)’은 아프리카 세네갈에 있는 애니 앤드 요제프 알베르스 재단(The Anni and Josef Albers foundation)의 레지던시에서 만들었다. 5주간 ‘최소한의 것으로 어떻게 창작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프로젝트였다. 세네갈에서 소똥은 건축 재료나 땔감으로 쓴다. 이걸 작업 재료로 쓰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작가 경력에 큰 영향을 준 작품이 있나.


“이란의 테헤란에서 작업한 벽화 ‘사랑에는 크기가 없다(Love Has No Size, 2019)’다. 이란의 벽화 대부분은 이슬람의 프로파간다(어떤 이념이나 사고방식을 설득하는 것)를 담고 있다. 그런 기존 문화에 반항하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담았기에 의미가 있다.”

마커로 페인팅 작업을 하는 작가. 올 하반기에는 NFT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지호영 기자]

다미앙 풀랑은 ‘모두를 위한 예술을 한다’는 철학을 담아 10여 년 전부터 더 많은 사람이 예술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디지털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8월에는 쿠웨이트 리빙편집숍 ‘더 콘란샵’에서 벽화 작업을 공개할 예정이다. 네덜란드 브레다에서 열리는 그래픽디자인 축제 ‘그래픽 매터스(Graphic Matters)’를 위한 워크숍도 준비하고 있다. 2024년에는 영국 패션 브랜드 ‘포크 클로딩(Folk Clothing)’과 의류 컬렉션을 출시한다.


다음 도전은 어떤 형태일까. 그는 “아랍에미리트에 있는 큰 사막에서 정말 많은 인원과 집단 퍼포먼스를 해보고 싶다”며 “유목 문명으로 만들어진 도시의 아름다움과, 사막이라는 대자연이 가진 압도적 아름다움을 가지고 작업하면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라고 답했다.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 파리=이진수 기자 h2o@donga.com


https://shindonga.donga.com/3/home/13/42868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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