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가타현, 일본판 '간난이'의 고장

by KOSAKA

1980년대, 한국의 텔레비전 속에 눈 내리는 일본 마을이 있었습니다. 초가집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어린 소녀가 눈밭을 헤치며 걸어갔습니다. 그 소녀의 이름은 오신(おしん), 그리고 그 무대는 야마가타현이었습니다. 드라마 〈오신〉은 일본 NHK가 1983년부터 1년간 방영한 국민 드라마로, 가난한 농가의 딸이 근대화의 격랑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일본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85년 KBS에서 방영될 당시 평균 시청률이 40%를 넘었고, ‘눈 속을 걷는 소녀’라는 이미지가 한 세대의 기억에 깊이 남았습니다. 그 출발점이 바로 야마가타현 오쿠라촌(大蔵村)이었습니다.


야마가타는 일본의 도호쿠(東北) 지방에서도 눈이 가장 깊이 내리는 지역 중 하나입니다. 겨울이면 마을과 마을이 눈으로 단절되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계절의 흐름에 맞추어 살아갑니다. 오신의 배경이 된 오쿠라촌은 실제로 지금도 ‘오신의 고향(おしんの里)’으로 불리며, 당시 촬영 세트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눈과 가난, 그리고 인내라는 세 단어는 이 드라마의 주제이자 야마가타의 현실이기도 했습니다. 근대 일본의 변두리에서 태어난 이 이야기는, 한 지역의 생활 정서가 세계적인 공감으로 확장된 보기 드문 사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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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 드라마 '오신'(좌측)과 MBC 드라마 '간난이'(우측)의 한 장면.

흥미롭게도, 같은 시기 한국에서도 비슷한 서사가 등장했습니다. 1983년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간난이〉는 전쟁 직후의 한국 농촌을 배경으로, 어린 소녀가 역경을 이겨내며 가족을 위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가난, 인내, 가족애라는 주제의식이 〈오신〉과 맞닿아 있었고, 두 작품 모두 한 시대의 여성과 민중이 겪은 현실을 상징했습니다. 두 드라마가 직접적인 연관이나 원작 관계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시대 동아시아 사회가 공유한 ‘결핍의 기억’과 ‘근대화의 고통’이 자연스럽게 닮아 있었습니다. 눈 덮인 야마가타의 오신과, 황토빛 들판의 간난이는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시대의 인내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야마가타의 중심 도시는 현청 소재지인 야마가타시(山形市)와 항구 도시 사카타(酒田), 그리고 내륙의 요네자와(米沢)입니다. 각각의 도시는 기후와 지형에 따라 전혀 다른 표정을 지닙니다. 사카타는 에도시대에 기타마에센(北前船)의 항로로 번성했던 상업의 도시였고, 야마가타시는 사케와 사과, 체리로 대표되는 농업의 중심지입니다.


요네자와는 우에스기 요잔(上杉鷹山)의 개혁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8세기 요네자와 번의 재정 파탄을 농업 개혁과 절약, 인재 육성으로 되살려낸 번주로, 존 F. 케네디가 존경하는 일본인으로도 자주 언급됩니다. “백성이 굶주림을 면치 못한다면, 다스림이라 할 수 없다.”는 그의 말은 지금도 지역의 정신을 대표합니다. 이런 전통 덕분에 야마가타는 근대 이후에도 지방의 자립성과 협동의 문화를 꾸준히 유지해왔습니다.


이 지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산업은 체리입니다. 일본 전체 체리 생산량의 약 70%가 야마가타에서 나옵니다. 여름이 짧고 낮과 밤의 기온 차가 큰 기후 덕분에 당도가 높고, 선물용 고급 과일로 자리 잡았습니다. 농가에서는 매년 6월이 되면 하늘의 구름 모양과 습도를 살피며 수확 시점을 정합니다. ‘사쿠란보 경제’라 불릴 만큼 체리는 지역 경제의 핵심이며, 농업 기술과 감각, 그리고 자연의 조화가 만들어낸 정밀한 결과물입니다. 경제를 감성으로 표현한다면, 야마가타의 체리는 ‘인내의 결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마가타는 또한 산과 신앙의 고장입니다. 현 서부에는 하구로산, 유도노산, 가산으로 이루어진 데와삼산(出羽三山)이 있습니다. 이곳은 불교적 순례의 중심지로, 세 산은 각각 ‘죽음’, ‘정화’, ‘재생’을 상징합니다. 순례자들은 흰 옷을 입고 세 산을 차례로 오르며,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수행을 합니다. 이러한 독특한 신앙은 ‘죽음을 통해 다시 사는 법’을 가르치며, 야마가타 사람들의 내면적 강인함을 형성했습니다. 실제로 이 지역에는 스스로 미라가 되어 불법의 완성을 추구했던 즉신불(即身仏) 승려의 전통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산과 신앙, 인간의 인내가 이어지는 이 구조는 일본에서도 매우 드문 문화적 층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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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몬겐 기념관 전경(좌측)과 YIDFF 2025 포스터(우측).

현대의 야마가타는 영화와 사진을 통해 그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사진가 도몬 겐(土門拳)은 사카타 출신으로, 노동자와 불상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리얼리즘 사진의 거장입니다. 그의 이름을 딴 ‘도몬겐 기념관’은 지금도 사카타의 대표적 문화 명소입니다. 또한 1989년에 시작된 ‘야마가타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YIDFF)’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다큐멘터리만을 전문 상영하는 국제 영화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영화감독 오가와 신스케(小川紳介)가 야마가타로 이주해 농촌과 벼농사를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한 것이 그 뿌리입니다. 이 영화제는 ‘기록의 윤리’와 ‘진실의 미학’을 중심 주제로 삼으며, 지역이 스스로의 삶을 세계와 대화시키는 드문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음악에서도 야마가타의 존재감은 작지 않습니다. 1972년 창단된 야마가타 교향악단은 인구 20만 명 규모의 도시에서 운영되는 세계적 수준의 오케스트라로, 지방 문화 자립의 성공 사례로 꼽힙니다. 농번기에는 연주 일정을 조정하고, 지역 학교와 협력해 어린이 음악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음악을 일상 속 문화로 정착시키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혹한의 겨울에도 음악당에서는 따뜻한 관현악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야마가타에서는 예술이 사치가 아니라 삶의 리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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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유명 사케 '주욘다이'(좌측). 야마가타 교향악단(우측).

이 지역의 또 다른 자부심은 전통 양조와 현대 브랜드의 결합입니다. ‘十四代(주욘다이)’로 알려진 사케는 일본 내에서도 ‘전설의 술’이라 불리며, 세계 사케 애호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한겨울의 찬 공기 속에서 천천히 숙성된 이 술은 기후, 물, 쌀, 그리고 장인의 기술이 완벽하게 맞물린 결과입니다. 눈의 나라가 만든 술은 결국 시간의 예술이기도 합니다.


야마가타의 사람들은 대체로 말수가 적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냉정이 아니라, 내면의 감정을 정제하는 과정입니다. 사람들은 말 대신 손으로, 술로, 음악으로 감정을 전합니다. 겉으로는 조용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뜨겁게 삶을 버텨온 세대의 기운이 흐릅니다. 오신이 눈 속을 걸으며 배운 것은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스스로를 지켜내는 법’이었습니다. 그 정신은 오늘날의 야마가타에도 그대로 이어져 있습니다.


눈이 내리고, 다시 녹을 때마다 이곳의 사람들은 묵묵히 일어섭니다. 야마가타의 역사는 거대한 영웅담이 아니라, 수천 번의 일상적 회복으로 쌓여 있습니다. 드라마 〈오신〉과 〈간난이〉가 그려낸 인내의 미학은, 결국 이 지역과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공통 언어였습니다. 야마가타는 단순히 눈이 많은 도시가 아니라, 눈이 기억을 만드는 지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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