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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담 少考

조회수 1000회 돌파기념 트릴로지 1

by KOSAKA

예전 브런치북을 분책하며 미처 정리하지 못한 글입니다.


얼마전 게재했던 “건담vs태권브이”의 조회수가 1000을 돌파했고 라이킷도 40을 넘었다. 브린이 작가로서 정말 감사한 일이다. 독자 여러분들을 그 글까지 이끌어준 알고리즘에게도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이런 일은 기념(?)하는 것이 인지상정인 바, 그리고 읽어주신 분들은 틀림없이 필자와 같은 덕후들이실 거라 예단하며, 후속 글로 3부작을 연재해보고자 한다.

우선은 지금도 현역으로 새로운 시리즈물이 나오고 있는 건담에 대해 다뤄보고, 독자들께서 태권브이와의 비교대상으로 옳바른 대상이라 해주신 마징가에 대해, 그리고 원래 게재됐어야 할 마징가vs태권브이라는 순서로 마무리하려 한다.

다행히 이곳도 연휴 비슷한 상황이라 회사원인 필자도 그 틈을 최대한 이용해 생각하고 고민하고 써보도록 하려 한다.

우선 건담이다.


1979년. <기동전사 건담>은 방영 초기부터 성공작은 아니었다. 당시의 메카 애니메이션 시장은 슈퍼로봇 장르의 전성기였고, 거대 로봇은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서 악을 무찌르는 어린이의 판타지를 실현하는 도구였다.


그러나 건담은 그 기대를 철저히 배신했다. 주인공 아무로는 싸움을 원하지 않았고, 건담은 전지전능하지 않았다. 전쟁은 선악의 구도가 아니라 정치와 이념, 이해관계가 뒤얽힌 복잡한 구조로 묘사되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고뇌하고 흔들렸다. 당연히 시청률은 저조했고, 조기 종영 위기까지 맞았다.


하지만 이 낯선 서사는 이후 극장판 3부작으로 재구성되며 작은 불꽃처럼 살아났고,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이후 건담 시리즈는 수십 편 이상 만들어졌으며, ‘건담’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단일 작품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거대한 서사 구조이자, 장르의 진화이며, 기계와 인간, 전쟁과 이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는 철학적 기호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때때로 묻는다. 건담은 왜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가. 아니, 건담이 존재하는 세계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게 되는가.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은 건담을 일컬어 ‘리얼로봇’ 애니메이션의 시초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이후 수많은 메카물이 그 장르명을 계승했지만, 건담이 말한 ‘리얼함’은 단순히 병기의 사실성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투기체가 얼마나 현실적인가가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함을 어떻게 직면하고, 전쟁이라는 체험을 감정의 진실로서 다룰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가깝다.


건담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고뇌하고, 때로는 회피하고, 전투 중에 흔들리며 자신의 존재를 되묻는다. 그들은 누구도 완성된 영웅이 아니다. 오히려 영웅되기를 거부한 자들이 전장에 떠밀려 나간다. 그래서 건담의 서사는 전형적인 영웅서사의 반대편에서 시작된다. 억지로 건담에 탑승한 아무로, 스스로의 감정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폭력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소년들의 모습은, 보는 이에게 전쟁의 ‘진짜 얼굴’을 들이민다.


이러한 건담의 세계를 구성하는 토대는 ‘우주세기(Universal Century)’라는 세계관이다. 단순한 SF 배경이 아닌 이 체계는, 전쟁의 반복이 어떻게 정당화되고 구조화되는지를 탐색하는 정치적 실험장이다. 지온은 독립을 외치지만, 그 내부에는 군국주의와 복수심이 꿈틀거리고, 지구연방은 평화를 말하지만 그 실상은 권위주의와 부패, 무책임이다. 여기엔 어느 쪽도 완전히 옳지 않으며, 완전히 그르지도 않은 회색의 윤리가 자리한다.


그리고 그 모순의 중심에는 샤아 아즈나블이라는 인물이 있다. 혁명가이자 복수자, 이념가이자 탈주자. 그는 건담의 세계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아이러니를 상징한다. 그는 인류의 진화를 말하며, 동시에 가장 원초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움직인다. 샤아는 불완전한 이상주의가 전쟁을 부추기는 구조를 몸으로 증명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건담이라는 로봇, 곧 ‘모빌슈트’는 단순한 병기인가. 건담은 기술을 초월한 윤리의 상징물처럼 기능한다. 조종사는 감정 상태에 따라 전투 능력이 달라지고, ‘뉴타입’이라는 개념은 인류가 진화함에 따라 기계와 감응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음을 예고한다.


건담은 인간이 만든 기술이 어느 순간 인간의 정신적 경계까지 넘어서게 될 때, 그 접점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를 상상한다. 기계는 인간의 도구일 뿐인가, 아니면 인간을 다시 빚어내는 새로운 틀이 되는가. 이 질문은 건담이 시종일관 붙잡고 있는 사유의 중심이다.


건담이 단순히 인기 콘텐츠로 머무르지 않고 40년 이상 지속된 이유는 이처럼 당대의 철학과 윤리를 흡수하고 반응하는 감각적 구조 덕분이다.


80~90년대의 건담은 냉전 종식 이후의 폭력과 평화, 이상과 상처의 간극을 고민했고, 2000년대의 시드(SEED)는 유전자 조작, 차별, 소년병이라는 키워드를 붙잡았다. 2022년의 <수성의 마녀>는 여성성과 가족의 해체, 자본주의, AI 기술이라는 가장 동시대적인 이슈를 기계 드라마에 결합했다.


이처럼 건담은 늘 로봇이라는 외피 안에 시대의 균열과 변화를 밀어넣고, 그 조각들을 감정적 서사로 버무리는 작업을 해왔다.


건담은 자주 추락한다. 대기권에 진입하다 실패하고, 전함과 함께 폭발하며, 혹은 조종사의 정신적 파탄으로 인해 버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또다시 복원되고, 다른 세계에서 재구성되며, 새로운 세대에 의해 다시 비행한다. 그 반복의 구조 자체가 신화다. 어느 것도 완성되지 않은 세계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는 기계’. 그것이 건담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질문할 수밖에 없다. 전쟁은 반복된다. 기술은 발전한다. 사람은 무엇을 바꿀 수 있는가. 건담은 이 질문에 대해 단 한 번도 확실한 답을 주지 않았다. 그 대신,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반복한다.


기계는 날아오르고, 인간은 불안에 떨고, 세계는 조금씩, 그러나 언제나 너무 늦게 바뀐다. 그러므로 건담은 여전히 날아야 한다. 그 비행이 멈추는 순간, 우리 역시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법을 잊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건담에 대한 추억과 생각을 댓글로 함께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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