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입은 옷》줌파 라히리

표지와 책등에 대한 독자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발굴하고자 한다면...

by 우주에부는바람

오래전, 얼마나 오래전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오래전, 정병규 선생을 대학로의 술집에서 만난 적이 있다. 지인의 초대를 받은 술자리에서였는데, 그곳에서 북디자이너라는 명칭을 처음 들었다. 책을, 거기에 포함된 활자, 활자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 이외의 무언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나는 의외로 북디자이너라는 직업에 대해 어렵지 않게 수긍하였다.




“책이 완성되고 세상에 입장하려는 순간에서야 표지가 나온다. 표지는 책이 탄생했음을 내 창조 과정이 끝났음을 표시한다. 내 손에서 독립해 자신의 생명을 갖게 됐다는 사실을 책에 쾅쾅 도장 찍는다. 작업이 마감됐음을 알려준다. 출판사에 표지는 책이 도착했음을 의미하지만 내겐 이별을 의미한다... 글 쓰는 과정이 꿈이라면 표지는 꿈에서 깨는 것이다.” (p.23)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오는 소설들의 책등에는 빨간색 띠에 햐얀 색 활자로 박힌 문학과지성사 로고가 자리 잡고 있다. 창작과 비평사나 민음사, 문학동네는 책등의 아래쪽에 출판사명을 로고로 집어넣어 놓았다. (거의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이 방식을 택하고 있다) 책장에 한꺼번에 꽂아 놓았을 때 다른 출판사들에 비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책들이 훨씬 눈에 잘 띈다.


“지금은 책을 사면 다른 것들도 덩달아 얻는다. 작가의 사진, 이력, 서평. 이 모든 게 상황을 복잡하게 한다. 혼란을 일으킨다. 길을 잃게 한다. 난 표지에 실린 논평이 못견디게 싫다. 그것 때문에 가장 불쾌한 영어 단어 ‘blurb'를 알게 됐다. 표지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싣는 건 적절치 않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독자가 내 책에서 만나는 첫 단어는 내가 쓴 말이길 원한다.” (p.48)


이상문학상 수상집의 표지는 1977년 1회부터 2011년 35회까지 거의 변하지 않은 채였다. 2012년 36회에서 그 표지 양식이 크게 바뀌었다. 하나의 세대가 지나도록 고수하던 표지 양식의 변화에 대한 소구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2016년 40회까지 지속되었던 표지는 2017년 41회에서 다시 예전의 형태로 돌아갔다. 나는 그 회귀를 반갑게 받아들였다. 나의 반가운 감정이 나의 보수화된 심신을 반영한 것인지 잠시 골똘하였다가 그만두었다.


“안타깝게도 표지 없이는 책을 팔 수 없다. 누구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책, 설명 없는 책을 사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지금의 독서는 관광객과 닮았다. 관광객은 안내 책자를 읽으며, 독자는 표지의 강렬한 이미지 덕분에, 모르는 지역에 내리기 전 정보를 얻고 방향을 잡는다. 관광할 장소를 직접 찾아가 그곳에 있기 전에, 책을 읽기 전에.” (p.49)


국내 최대 온라인 서점인 예스24의 블로그에서는 책에 대한 평가를 할 때 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책의 편집과 구성에 대한 별점도 부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책을 쓰는 사람의 입장뿐만 아니라 책을 만드는 사람의 공과까지도 다루어보겠다는 서점 측의 의도가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곳에 별점을 부여해야 하는 시간이 되면 꽤나 고민하게 된다. 도드라지는 편집과 구성(표지 디자인을 포함하여)의 책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 나는 무미건조한 표지나 날 슬프게 하는 표지보다는 전집의 우아한 유니폼을 더 좋아한다. 자신을 표현하는 건 달라지려 노력한다는 의미라는 걸 안다. 작가의 목소리는 고유하고 고독하다. 예술은 어떤 언어로, 어떤 방법으로, 어떤 옷을 입고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p.82)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나온 소설의 표지, 그러니까 제임스 설터나 줌파 라히리 번역본들의 표지에 후한 점수를 보내는 편이다. 왠지 마음이 따뜻해진다고나 할까. 이번 줌파 라히리의 책은 이탈리아어로 쓰인 그녀의 두 번째 산문집이고 표지 또한 기존의 줌파 라히리 책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다만 책이 품고 있는 활자의 양과 그 무게에 비하여 종이의 두께나 (최근 읽은 책을 통틀어 가장 무거운 종이를 사용하고 있다) 양장이라는 포장은 과하다는 느낌이다. 줌파 라히리가 은연 중에 보내는 우려를 고려해서라도...



줌파 라히리 Jhumpa Lahiri / 이승수 역 / 책이 입은 옷 (The Clothing of Books, Il Vestito del Libri) / 마음산책 / 95쪽 / 2017 (201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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