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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끊으면 인생이 보인다

그리고 자존심이 생긴다

by 송면규 칼럼니스트

한때는 "술이 사람을 만든다"고 믿었다. 회식 자리에서 웃음의 윤활유가 되었고, 친구들과의 정을 확인하는 매개이기도 했다.


"술 한 잔 하자"는 말은 위로이자 용서였고, 또 다른 시작의 신호였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술과 함께 보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의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술기운이 가신 다음 날마다 밀려드는 공허함과 후회, 흐릿한 기억 속의 말실수들, 지워버리고 싶은 장면들.


그때 깨달았다. 술은 내 삶의 윤활유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키를 빼앗는 족쇄였다는 것을.


술을 끊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아침의 공기 냄새, 밤하늘의 별빛, 사람들의 진심,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다.


그동안 술에 기대어 감정을 흩뜨렸고, 책임을 미뤘으며, 나약함을 합리화했다. 하지만 술잔을 내려놓자 세상이 명료해졌다.


어제의 실수도, 오늘의 현실도, 더 이상 술을 탓할 수 없게 됐다. 대신 직면해야 했다. 그 과정이 처음에는 고통스러웠지만, 점점 두려움이 줄고 자존감이 자라났다.


술을 끊는다는 것은 단순히 "마시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내 감정과 습관을 통제하고, 나 스스로를 존중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몸이 맑아지면 마음도 따라 맑아진다. 판단력이 선명해지고, 사람을 가려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 어제의 나는 술기운에 떠밀리며 말했지만, 오늘의 나는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단련한다. 그 차이가 자존심이다.


흥미롭게도, 술을 끊고 나면 사람의 관계도 달라진다. 진심으로 나를 아끼는 사람과, 단지 술자리가 좋아서 곁에 있던 사람의 구분이 뚜렷해진다.


가벼운 인연은 사라지고, 깊은 인연이 남는다.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지만, 그 고요가 외롭지 않다. 오히려 그 시간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인생의 방향을 세울 수 있다.


술을 끊은 뒤, 나는 '자존심'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았다. 남의 눈치가 아니라, 내 마음의 중심을 세우는 것, 순간의 즐거움보다 긴 시간의 평온을 택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어른의 선택이다.


술이 인생의 재미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인생은 술을 끊은 후에 시작된다. 술기운 속에서는 결코 볼 수 없던 세상의 색깔이, 이제 선명하게 보인다.


위 글은 술 늪에서 빠져나온 친구 K군의 경험담을 참고하였으며, 이제는 '불금' 운운하며 술집 향하는 문화에서 해방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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