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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성 Apr 10. 2019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반차 같은 삶

반차 같이 사는 게 제 꿈입니다

출근하려고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노랗게 핀 개나리꽃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폰으로 개나리꽃을 찍으려는 순간 마을버스가 와 그냥 타고 말았다. 만원 버스를 견디기 위해 여느 때처럼 자리에 앉아 에어팟을 끼고 눈을 감았다.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였다. 이대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시간이 오래오래 흘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른한 온도. 눈을 감고 있어도 눈부신 햇살이 버스가 언덕을 내려가는 내내 그림자를 만들었다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마침내 봄이 온 것이었다! 출근길 BGM은 공교롭게도 잔나비의 플레이리스트였는데, 덕분에 싱숭생숭한 마음이 봄의 충동으로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지난겨울은 유독 나에게 혹독했다. 계절이 바뀌어도 마찬가지였다. 절기상으론 봄이 되었지만 출근길 아침은 늘 잿빛이었다. 그 날은 겨울에서 봄이 되는 내내 칙칙했던 출근길 중 컬러풀한 수채화 같은 유일한 날이었다. 금방 지나가 버리고 말 완연한 봄을 놓치기 싫어 그 길로 출근해 다음 날 오후 반차를 쓰기로 했다. 누군가에게는 날씨가 좋다는 이유로 반차를 쓰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인트라넷에 접속해 오후 반차를 클릭하고 나니 '사유'를 적는 칸이 눈에 들어왔다. '사유 : 날씨가 좋아서'라고 쓰고 싶었지만... 그리 자유로운 분위기의 회사가 아니라 이해받기 힘들 게 분명하다. 의도와는 다르게 반항하는 걸로 찍히거나 후배들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희대의 사이코 직원이 될지도 모른다. 봄기운 때문인지 진짜 이유를 쓰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늘 그랬던 대로 형식적인 사유를 써서 제출했다. (그런데 휴가를 쓰는 데 왜 사유까지 써야 하는 걸까?)


오후 반차를 쓴 날 아침 출근길은 발걸음이 유독 가벼웠다. 아침잠이 많은 탓에 휴가를 쓰면 썼지 반차를 쓴 적은 거의 없었던지라 반차를 쓴 날의 기분을 온전히 느껴보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나 오늘 반차야" 같은 팀 아이들에게 자랑하듯 말했다. 다들 어디 가냐고 물었다. 글쎄. 딱히 거창한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다. 평소 금요일 퇴근하고 하는 나의 리추얼들을 봄 볕을 즐기며 더 오래오래 하겠다는 게 유일한 계획이었다.


오전 근무를 마치고 점심부터 고기를 구우러 갔다. 금요일 밤 지하철은 쭉 늘어선 줄, 겨우 타더라도 겨우 숨 쉴 공간만 확보한 채 다른 사람과 몸을 부대끼며 가는 동안에 녹초가 된다. 하지만 금요일 대낮의 지하철은 엄청나게 쾌적했다. 시달리지 않아서인지 고기도 평소보다 더 맛있고, 무엇보다 창 밖으로 한낮의 봄을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흐린 날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의 기분이었을 것이다. 날이 좋아서, 좋지 않아서,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는 <도깨비>의 대사는 반차를 쓴 날 오후를 위해 탄생한 게 아니었을까.


구운 고기를 먹고 좋아하는 카페에 가 책을 펼쳤다. 단지 반차를 썼을 뿐인데, 나는 왜 이렇게 행복해진 걸까?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니고 하루에 절반 일을 안 한 것뿐이잖아? 그 순간 나는 앞으로의 내 인생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반차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인생 계획을 물어온다면 말할 거리가 드디어 생긴 것이다. '반차 같은 삶을 사는 게 제 꿈입니다'


누군가는 '그럴 바에 휴가 같은 삶을 사는 게 낫지 않나요'라고 묻겠지만 천성이 게으른 나에게 휴가 같은 삶은 쥐약이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되던 시절, 그 생활이 딱 6개월까지는 꿀 같았지만 그 이후로는 지옥으로 바뀌는 경험을 했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해야 할 일도 없다 보니 저녁에 잠도 오지 않아 생활이 엉망으로 바뀌었다. 까짓 거 밤낮 바뀌는 게 뭐가 대수랴, 했지만 밤에 깨어있는 삶을 살다 보니 낮에 아무리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도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좋거나 싫은 게 없어진 일상은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규칙적으로 일어나 명민하게 일하는 감각은 유지하면서도 계절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만 바쁜 반차 같은 삶. 삶에 적당한 규율이 존재하면서도 자유가 더 많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매우 이상적이 아닐까 싶다. 매일매일 성실하게 일을 하면서도 봄 햇살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는 삶을 살 것.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반차처럼 살고 싶다.



글 ㅣ 김희성

그림 ㅣ 김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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