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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블스플랜2> 규현, 윤소희의 행동이 보여준 것

by 박정빈

* 이 글은 넷플릭스 <데블스플랜: 데스룸>의 내용 및 스포일러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의자'를 떠올려 보자.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의자의 이미지는 네 개의 다리, 등받이, 팔걸이, 푹신한 쿠션 등을 갖춘 형태일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요소들이 제거되었을 때, 과연 언제까지 그것을 ‘의자’라 부를 수 있을까?


팔걸이를 없애보자. 여전히 의자다. 등받이를 제거해도, 여전히 앉을 수 있다면 의자의 기능은 유지된다. 다리를 줄여 낮은 좌식 형태로 바꾸더라도,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구조를 갖춘 한 의자로 간주된다. 심지어는 단 하나의 받침 위에 평평한 판이 놓여 있어도, 그것이 사람의 하중을 지탱하고 앉을 수 있도록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의자’라 부른다.


이처럼 의자의 본질은 ‘인간이 앉을 수 있도록 지탱하는 기능’이며, 그 외의 요소는 모두 장식이거나 편의성을 위한 보완물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하나의 명제를 도출할 수 있다.



"사물을 더 이상 분해할 수 없을 때, 마지막에 남은 것이 그 사물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서바이벌 장르의 본질은 뭘까? 드라마틱한 서사? 참가자들의 눈물과 갈등, 우정? 긴박한 음악 속 펼쳐지는 천재적인 전략? 무엇이 서바이벌을 서바이벌로 존재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서바이벌류 프로그램의 아버지 <더 지니어스>도 아니고, 큰 흥행을 거둔 <피의 게임>도 아닌, 역설적이게도 큰 비판을 받고 있는 넷플릭스 <데블스 플랜2>의 실패를 통해 발견된다.


시리즈의 첫 작품인 <데블스 플랜1>이 던지는 핵심 질문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아무도 탈락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다. 참가자 궤도는 작중에서 ‘최대 다수의 최대 생존’으로 요약되는 공리주의 이념을 주장하며 대다수의 플레이어들과 연합을 맺고, 서로 죽고 죽이는 제로섬 게임 구조 자체에 반기를 든다. 궤도를 중심으로 뭉친 플레이어들은 경쟁이 아닌 협력을 통해 게임을 풀어 나가며, 룰의 구조적 허점을 파고들어 탈락자를 한 명도 발생시키지 않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


이는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떨어뜨려야 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기본 구조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기초적 전제이자 토머스 홉스의 자연 상태에 대한 가정—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를 전면 반박하는 듯한 모습이다. 이러한 궤도의 전략은 그 타당성과는 별개로 서바이벌 장르 애청자들에게 ‘장르의 매력을 흐리는 플레이’로 비판받으며 <데블스 플랜1>의 낮은 비평적 평가에 일조했다.


허나 궤도의 공존 전략은 결국 언젠가는 붕괴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협력을 통해 많은 수의 참가자가 끝까지 생존한다 해도 결국 상금을 거머쥐는 우승자는 단 한 명뿐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궤도 역시 어쩔 수 없이 파이널 라운드에서는 연합을 해체하고 개인전을 통해 우승자를 가렸다. 이는 그가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라는 명제에는 반대했을지언정, 서바이벌(survival; 생존)이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인 “살고 싶다“라는 전제는 여전히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데블스플랜1>은 서바이벌 장르 특유의 매력은 조금 떨어질지언정, 여전히 서바이벌 장르의 일부로 분류될 수 있었다.


하지만 <데블스 플랜:데스룸>(이하 ‘데블스 플랜2’)에서는 그 마지막 전제마저 해체된다. “서바이벌 참가자가 승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모순적인 질문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모든 행위자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한다는 명제를 당연한 전제로 하듯이, 참가자들은 모두 자신의 승리를 최우선 목표로 한다는 것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가장 기본적이고 암묵적인 전제조건이다.


허나 <데블스플랜2>의 참가자 윤소희규현은, 아마도 서바이벌 역사상 최초로, 자신의 승리를 거부하는 플레이를 보여준다. 규현은 자신이 아끼는 참가자인 정현규의 게임 재화를 지켜주기 위해 대신 탈락하며, 윤소희는 방송 내내 자신이 아닌 정현규의 우승을 염원하면서 물심양면으로 헌신한다. 심지어는 자신이 정현규 대신 결승에 진출할 기회가 주어지자 이를 거부하고 싶은 듯 눈물을 보이며 고민하기도 한다. 이는 ‘자신의 승리’를 추구한다는 서바이벌 장르의 기본적인 대원칙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동 양상이다.


승리가 목표인 게임에서 승리를 거부한 결과는 명확했다. 그들은 혹독한 여론의 비판을 직면하게 되었고, 이 프로그램을 더 이상 서바이벌 장르로 분류할 수조차 없다는 시청자들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즌1이 마니아들의 미적지근한 반응과는 반대로 대중적 흥행 면에서는 어느 정도 선방했던 것과는 달리, <데블스플랜2>는 대중과 마니아 모두가 등돌린, 명백히 실패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실패는 서바이벌 장르의 존속과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데블스 플랜2>에게 결여되었던 요소야말로 서바이벌 포맷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 즉 ‘본질’임이 역설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비록 정종연 PD가 이를 의도하진 않았을지라도, 그 결과물은 서바이벌이라는 장르의 존재 조건이 무엇인지 되묻게 하는 메타적 실험으로 작용했다. 규현, 윤소희에 의해 ’승리에 대한 욕구‘라는 요소가 분해되었을 때 시청자가 느낀 불편한 이질감은 그것이 이 장르를 정의하는 최소한의 조건이었음을 역설한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참가자들은 자신이 패배하지 않도록 노력하며 자신의 승리를 추구해야만 한다. ‘승리‘와 ’패배’라는 거대한 두 개의 축은 ’욕망‘이라는 끈끈한 접착제로 연결되며 서바이벌 장르의 근원적 구조를 지탱한다. 승리를 욕망하지 않는 서바이벌은 서바이벌이 아니다. <데블스 플랜2>는 극단적 형식 해체의 메타-서바이벌로 스스로를 환원하면서 비로소 이 명제를 밝혀낸다.


해체를 통해 본질을 밝혀내는 작업은 예술 장르의 계보 속에서 언제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독자와의 정정당당한 승부‘를 표방한 고전 추리 소설의 전제는, 작가가 제공하는 정보는 모두 진실이며, 본문에서 언급된 단서들은 독자가 진상을 추리하기에 충분하게 제시되어야 하며, 탐정은 독자를 대신해 진상을 밝히는 페르소나적 존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추리소설의 거장 애거서 크리스티는 이러한 기본적 전제들을 하나씩 허무는 실험을 시도했다. 가령, “탐정이 범인이라면?”, “애초에 본문의 서술 자체가 거짓이라면?”과 같은 도발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플롯을 구성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추리소설의 암묵적 규칙이자 독자와의 신뢰를 저버리는 비겁한 행동, 혹은 반칙 행위‘으로 비판받기도 했지만, 결국 추리 장르의 잠재력을 한층 확장시키며 그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데블스 플랜2>가 서바이벌 장르에 기여한 바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크리스티는 '꼭 필요하지는 않은 것'을 걷어내는 작업을 성공시키며 장르의 핵심 성질을 찾아냈다면, <데블스 플랜2>'꼭 필요한 것'을 제거해 버리는 치명적 실패를 통해 장르의 본질을 찾아내는 데 본의 아니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지만, 어쨌든 가장 유용한 반면교사가 되어준 셈이다.


이제 우리는 안다. <데블스 플랜2>가 부재로써 증명한 바로 그것이야말로 서바이벌 장르의 가장 내적인 구조라는 사실을. 향후 이 장르의 진화를 고민하는 제작자들에게 이 프로그램은 단순한 실패 사례가 아니라 본질적 기준점이자, 장르적 탈주선 위에서 비틀린 방식으로 진실에 도달한 비극적 유산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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