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세라핌 〈SPAGHETTI〉
다이어트를 작심삼일로 끝내 본 사람이라면 안다. 어느 밤, 배가 고파서라기보다 마음이 허전해서 배달앱을 켜는 순간이 온다는 걸. 분명 방금까지는 “오늘은 샐러드만 먹어야지”라고 다짐했는데, 메뉴판을 넘기다 보면 손가락이 자꾸 기름진 사진 쪽으로 미끄러진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를 한 번 더 다그친다. “난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하지?” 이런 자기 비난의 목소리를, 미국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본다. 그녀는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어떤 ‘원래의 나’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매일같이 “이게 여자답다”, “이게 어른답다” 같은 말을 듣고, 그 말들을 따라 몸을 움직이고 표정을 골라 쓰면서, 서서히 어떤 사람이 되어 간다. 이렇게 되풀이되는 말과 행동이 쌓여서,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존재가 형성된다. 버틀러는 이 과정을 ‘수행성(performativity)’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수행이 늘 규칙대로만 흘러가는 건 아니다. 시킨 대로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살짝 비틀리는 장면이 생긴다. 그 어긋난 틈을 붙잡고 주어진 대본을 되돌려 쓰는 일, 버틀러를 따라가면 이걸 일종의 ‘전유(appropriation)’로도 읽어볼 수 있다. 남이 던져 준 언어로 다시 나를 쓰는 일, 그 안에서 기준을 조용히 뒤집는 일.
르세라핌의 〈SPAGHETTI〉를 듣고 있으면, 이 이야기가 머릿속 이론이 아니라 매운 냄비 요리처럼 현실에서 보글보글 끓는다는 생각이 든다. 노래 속 화자는 처음부터 예의나 단정함의 규칙에 빌붙지 않는다. “Don’t give a fuck 네가 뭐라던”, “필요 없어 three star”라고 가뿐히 밀어내고, “어디 갔어 너의 diet”라는 질문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걸 그저 ‘요즘 애들 패기’ 정도로 읽겠지만,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이면 다른 장면이 보인다. 여기서 화자는 규칙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 언어를 일부러 더 크게, 더 과하게 따라 하며 비틀어 버린다. “Eat it up eat it eat it up”을 반복하는 후렴은 단순한 식욕의 폭주가 아니다. “조금만 먹어라”, “살 빼야 예쁘다”는 말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자동으로 반복되어 왔는지를 거울처럼 비춰 주는 움직임에 가깝다.
재미있는 건, 이 노래가 ‘먹는 나’를 숨기기는커녕, 아예 카메라 중앙으로 끌고 나온다는 점이다. “어디 갔어 너의 diet”라는 질문이 등장할 때, 우리는 너무 익숙한 장면을 떠올린다. 친구들 앞에서 괜히 “나 오늘 이것만 먹을 거야”라고 말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특히 그렇다. 하지만 화자는 그 익숙한 대사를 있는 힘껏 뒤집는다. “Chef’s choice, 널 위한 킥이야”라는 표현은, 원래 권위를 가진 쪽—별점 주는 사람, 평가하는 시선—에게 붙어 있던 언어를 자기 쪽으로 가져오는 몸짓이다. 이건 대놓고 싸우는 선언이라기보다, “그래, 네가 만든 룰 안에서라면, 그 룰을 내가 더 재밌게 써 볼게”라는 조금 비틀린 승낙에 가깝다. 버틀러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규범 바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어렵다. 그래서 어떤 저항은 ‘따르지 않겠다’가 아니라, ‘따르는 척하면서 다른 의미를 흘려보내기’의 방식으로 등장한다.
이런 모순은 가사 곳곳에서 다시 고개를 든다. 화자는 동시에 “Don’t give a fuck 네가 뭐라던”이라고 말하면서도, 분명 누군가의 시선을 알고 있다. “나를 평가해도 좋다, 어차피 나는 내 방식대로 먹을 거니까”라는 태도에는 약간의 허세와 진짜 결심이 함께 들어 있다. 중요한 건 바로 그 이중성 자체다. 우리는 늘 규칙의 언어를 쓰면서도, 그 말들을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 “예의 있게 먹어라”라는 말 뒤에 숨은 메시지를 알아차릴 때, 즉 ‘여자는 이렇게 보여야 한다’는 구조를 감지하는 순간, 같은 동작이 다른 의미를 띤다. 카메라 앞에서 포크를 크게 휘두르는 몸짓이, 그냥 귀여운 퍼포먼스를 넘어, “이렇게 먹는 모습도 화면에 걸어둘 가치가 있다”라고 주장하는 장면으로 변한다. 그때 먹는 입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기관이 아니라, 룰을 다시 쓰는 펜과도 같다.
그래서 〈SPAGHETTI〉는 단순히 “먹어도 돼, 살쪄도 돼”라고 말하는 응원송에 머물지 않는다. 물론 그 말 자체도 여전히 필요하지만, 이 노래가 던지는 질문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먹는 나’를 통제하고 숨기도록 훈련되어 왔을까? 왜 어떤 식욕은 귀엽게 소비되지만, 어떤 식욕은 금세 ‘선을 넘는 것’이 되어 버릴까? 버틀러의 말을 빌리면, 그 이유는 우리가 이미 수많은 기준의 문장들 속에서 자라왔기 때문이다. “조금만”, “예쁘게”, “과하지 않게” 같은 말들이 매번 반복될수록, 우리는 어느새 그 기준에 맞춰 움직이는 몸이 된다. 그런데 르세라핌의 화자는 그 문장을 똑같이 발음하면서, 내용만 슬쩍 바꿔치기한다. “먹지 말라”는 리듬 위에 “Eat it up eat it eat it up”이라는 가사를 얹는 행위. 이 겹침 자체가 이미 익숙한 질서를 안에서부터 흔드는 몸짓이 된다.
결국 이 노래가 보여주는 건, 정체성이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본질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어떤 말을 듣고, 그 말을 몸으로 되풀이하며, 그러는 사이에 하나의 ‘나’가 형성된다. 그렇다면 다른 말을, 다른 몸짓을, 다른 반복을 선택하는 순간, 나라는 존재의 윤곽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SPAGHETTI〉는 “먹는 걸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넘어서, “나를 규정하던 대본을 내가 다시 쓸 수 있다”는 가능성을 슬쩍 보여준다. 다이어트를 또 망쳤다는 죄책감 대신, 오늘은 그냥 한 접시 꽉 채운 면을 집어 들고, “그래도 나는 나를 사랑하겠다”라고 중얼거리는 밤. 어쩌면 그런 밤 하나하나가, 우리가 배워 온 말버릇들을 아주 조금씩 수정해 가는, 아주 작은 수행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