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라스(KIIRAS) 〈KIIRASMAS〉
겨울이 오면 해마다 비슷한 장식과 노래가 거리를 채운다. 트리와 조명, 캐럴과 이벤트 문구까지 거의 틀리지 않고 반복된다. 그런데 정작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우리의 마음은 매번 조금씩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어떤 해에는 같은 멜로디가 이상하리만치 들뜨게 들리고, 또 어떤 해에는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 속에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이 스며든다. 키라스의 〈KIIRASMAS〉는 바로 이 묘한 겨울의 감정을 솔직하게 끌어올린다. 이미 수없이 지나간 계절인데도 “왠지 벌써부터 기대되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뭔가 달라질 것 같다”라고 되뇌는 목소리를 그대로 내어놓는다. 새하얀 눈이 쌓이고, 캐럴이 흘러나오고, 트리 위에는 캔디 케인이 달리고, 귀에는 종소리가 울린다. 이 곡은 겉으로만 보면 단정하게 잘 만들어진 시즌송 한 곡이다. 그런데 듣다 보면 다른 질문이 서서히 떠오른다. 우리는 왜 해마다 비슷한 의식을 반복하면서도 여전히 이런 노래에 마음을 내어줄까. 그렇게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해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의미를 얻게 되는가. 이 지점에서 독일 철학자 한스게오르크 가다머의 축제와 놀이에 관한 사유가, 의외로 KIIRAS의 이 가벼운 겨울 노래와 자연스럽게 맞닿는다.
가다머는 “이해”를 단지 책을 읽고 요약하는 능력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우리가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연극과 스포츠, 놀이에 빠져들고, 매년 돌아오는 축제에 몸을 맡길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있었다. 그는 특히 세 가지 이미지를 자주 불러낸다. 하나는 “놀이(Spiel)”다. 규칙이 있으면서도, 막상 빠져들면 내가 놀이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가 나를 끌고 가는 것 같은 상태. 다른 하나는 “축제(Fest)”다. 달력에서는 매년 돌아오는 같은 날이지만, 실제로는 참여하는 사람과 분위기, 마음 상태에 따라 매번 다른 얼굴을 갖는 시간. 그리고 이해를 설명하기 위해 그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 “지평의 융합”이다. 각자는 저마다의 경험과 전통, 언어의 배경을 지닌 채 세계를 바라본다. 그 배경을 가다머는 ‘지평’이라 부른다. 그런데 예술 작품, 다른 사람, 낯선 전통을 만날 때, 내 지평과 타자의 지평이 서로 포개지며 조금씩 변형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해란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더 넣는 일이 아니라, 이 세 가지—놀이, 축제, 지평의 변화—가 뒤섞인 자리에서 “아, 이게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뒤늦게 따라오는 깨달음에 가깝다고, 가다머는 말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이제 〈KIIRASMAS〉를 천천히 따라가 보면, 이 노래는 처음부터 우리를 하나의 “놀이판” 안으로 끌어들인다. 곡의 도입부에서 “Hello, you there”하고 가볍게 부르는 목소리는 특정한 누군가를 지목한다기보다는, 이 노래를 우연히 틀어 놓은 누구든 향해 건네는 손짓이다. 이어지는 “나가 보자, KIIRASMAS가 왔다”는 말은, 혼자 방 안에 웅크려 있던 청자를 거리의 장면 속으로 슬쩍 끌어당긴다. 곧이어 눈이 포근하게 내리고, 종소리와 캐럴이 겹쳐 들리고, 트리에는 막대 사탕이 걸린다. “하루 종일 캐럴이 재생되고, 캔디 케인을 걸고, 좋아하는 캔들을 켠다”는 구체적인 문장들은, 우리가 노래를 듣는 단순한 청자를 넘어 그 장면 안의 인물로 들어가 있다고 느끼게 만든다. 후렴에서 반복되는 “KIIRASMAS is coming to town”이라는 구호와 직선적인 리듬은, 듣는 사람이 어느 순간 입술로 따라 하게끔 만든다. 가다머가 말했듯, 놀이의 본질은 “놀이하는 사람”의 의식보다 놀이 자체의 흐름에 있다. 우리는 놀이를 시작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놀이가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다”라고 느끼게 된다. 이 노래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내가 이 곡을 재생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새 그 리듬과 이미지가 내 기분과 상상을 주도하게 된다. 이번 겨울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던 사람도, “조금 설레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는 순간, 이미 노래가 여는 놀이에 참여한 것이다. 이해는 그 이후에 온다. 왜 이 겨울 노래가 나에게 괜히 위로처럼 느껴졌는지, 왜 따라 부르고 난 뒤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는지에 대한 사유는, 몸이 먼저 반응한 뒤 천천히 따라오는 셈이다.
가다머가 즐겨 꺼냈던 두 번째 이미지인 “축제” 역시 〈KIIRASMAS〉 곳곳에 배어 있다. 크리스마스는 말 그대로 달력 위에 인쇄된 반복되는 날짜다. 그러나 노래 속 화자는 그것을 단순한 반복으로 받지 않는다. 그는 “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라고 말하고,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뭔가 달라질 것 같다”라고 느낀다. 가다머가 보기에, 축제의 시간은 바로 이런 긴장으로 구성된다. 같은 날이지만, 매번 처음 맞이하는 지금이다. 우리가 그날을 누구와 보내는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같은 크리스마스가 전혀 다른 의미를 띤다. 가사 속 겨울 도시는 “여기도, 저기도, 온통 행복해 보이는” 분위기로 묘사된다. “거리 위에는 환상적인 파티가 펼쳐져 있고, 그냥 지나칠 수 없다”라고 노래할 때, 이 축제의 주인공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그 공간을 공유하는 모두 다. 가사는 “누구든 여기로 놀러 와, 함께할수록 더 신나는 순간”이라고 말하며, 이 자리를 누가 중심에 설 것인지 겨루는 무대가 아니라 각자가 조금씩 역할을 만들어가는 공동의 시간으로 그려낸다. “아쉬웠던 날은 잠시 옆으로 두고 오늘을 즐기자”는 대목에서, 축제는 현실을 부정하는 도피가 아니라, 같은 현실을 다른 빛으로 비춰 보는 시도로 모습을 바꾼다. 올해도 힘들었던 일, 채 풀리지 않은 감정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오늘 하루만큼은 서로를 위해 시간을 내자고 조용히 합의하는 날. 가다머가 말한 축제가 바로 이런 것이다. 일상과 완전히 분리된 비현실이 아니라, 일상 전체를 잠깐 다른 관점에서 다시 쓰게 만드는 사건. 〈KIIRASMAS〉의 크리스마스는 “모든 걸 잊고 놀아버리자”가 아니라 “이 삶 그대로를 선물처럼 잠시 다르게 포장해 보자”는 제안에 가깝다.
세 번째로, 가다머의 핵심 개념인 “지평의 융합”은 이 노래의 언어와 제목,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다루는 방식에 응축되어 있다. “지평”이라는 말은 조금 낯설지만, 쉽게 말해 우리가 어떤 것을 볼 때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는 시야, 숨겨진 배경에 가깝다. 각자는 어린 시절의 기억, 종교적 배경, 가족 이야기를 품은 채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를 듣는다. 누군가에게는 교회 예배와 관련된 날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가족과의 따뜻한 식탁, 또 다른 이에게는 소비와 할인 이벤트의 이미지일 수도 있다. 이 서로 다른 지평 위에 KIIRAS는 “KIIRASMAS”라는 단어를 얹는다. 익숙한 “크리스마스” 앞에 자기 이름을 붙여, 조금 장난스럽지만 새로운 상징을 만든다. 이때 청자는 자신의 지평을 약간 비틀어야 한다. 크리스마스를 특정한 종교적 의례나 가족 행사로만 바라보던 시야에서 잠시 벗어나, 지금 여기서 이 노래를 듣는 사람들—팬이든 아니든—이 공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축제로 상상해 보게 된다. “우리가 세상에 기쁨을 가져온다”, “하얗게 울려 퍼지는 노래를 밤새 같이 불러보자”는 가사는, 특정 교리나 이념을 설파하기보다는, 이미 익숙한 겨울의 기호들—눈, 종소리, 트리, 캐럴—을 다시 배열해 “이 겨울을 이런 방식으로도 살아볼 수 있다”는 시야를 펼쳐놓는다. 가다머식으로 말하면, 나의 크리스마스 경험의 지평과 이 노래가 제안하는 축제의 지평이 살짝 겹치며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는 순간이다. 이해는 바로 이런 식으로 일어난다. 특별한 설명을 듣지 않아도, 노래가 끝난 뒤 “올해는 왠지 이 말이 입에 붙네, KIIRASMAS” 하고 웃게 된다면, 이미 지평의 작은 변형이 일어난 것이다.
이제 다시 노래의 제목으로 돌아가 보면, 〈KIIRASMAS〉는 단순한 말장난 이상의 것을 품고 있다. 이 한 단어는 “KIIRAS의 크리스마스”라는 의미를 담으면서도, 듣는 이들에게 “그렇다면 너의 겨울은 어떤 이름을 가질 수 있을까”라고 되묻는 장치가 된다. 가다머의 시선으로 보자면, 이 제목은 하나의 해석적 초대장이다. 너는 어떤 지평에서 이 계절을 맞이하고 있고, 이 노래와 함께라면 그 지평을 어떻게 조금 달리 써 볼 수 있을까. 곡을 듣는 동안 우리는 놀이에 휘말리고, 축제의 한가운데 서서, 익숙했던 상징들이 다른 조합으로 다시 배열되는 장면을 통과한다. 그리고 노래가 끝난 뒤에도 귀에 맴도는 후렴과 리듬은, 단순한 상업적 훅이라기보다 “올해의 겨울을 우리끼리 한 번 다시 써 보자”는 제안처럼 남는다. 이해는 언제나 나중에 도착한다. 이번 겨울이 지나고 난 뒤, 우리는 문득 돌아볼지도 모른다. 왜 그때 나는 이상하게 들떠 있었는지, 왜 낯선 이 단어를 별생각 없이 따라 불렀는지, 그리고 그 겨울이 어떻게 이전의 겨울들과는 조금 다른 빛으로 기억되는지. 그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KIIRASMAS〉는 단지 매장을 채우던 배경 음악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을 함께 쓰고, 놀이와 축제, 지평의 변화를 아주 가벼운 방식으로 체험하게 해 준 하나의 작은 축제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우리는 이미 이런 식의 이해를 살아내고 있다. 가다머의 이름을 알지 못해도, 어느 겨울밤“KIIRASMAS is coming to town”을 흥얼거리며 눈 내리는 거리를 걸었다면, 우리는 그 순간 놀이에 몸을 내맡기고, 축제의 시간 안에 서서, 나와 세계의 경계를 조금 다르게 느끼고 있었던 셈이다. 이해는 그렇게 찾아온다. 머리로 먼저 정의를 세우고 나서 감정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하고, 나중에야 “그때의 겨울이 내 안에서 무엇을 바꾸어 놓았는지”를 천천히 알아가는 일. 그런 의미에서 〈KIIRASMAS〉를 듣는다는 것은, 겨울밤의 팝 음악을 통해 가다머가 말한 축제와 놀이의 철학을 가장 부드러운 방식으로 통과하는 경험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철학의 이름을 몰라도, 이미 그 일부를 이렇게 노래하며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