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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Oct 24. 2021

에릭 요한슨 사진전

63 아트 센터 전시

 10월 21일 목요일 오후, 휴가를 내서 여의도로 향했다. 63 아트에서 열리고 있는 <에릭 요한슨 사진전>을 관람하러 갔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63 빌딩은 이제 한국의 높은 건물 순위 10위 안에도 들지 못한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을 지키며 얻은 아우라가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쌓인 퇴적물이라 할 수 있겠다. 조금은 퇴락했지만 여전히 굳건한 존재감을 뽐낸다. 처음 서울로 올라와 부모님을 모시고 전망대에 올라 서울의 위용에 감탄했던 30여 년 전의 추억도 소환됐다. 60층에 있는 전시장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여의도 한강 공원과 남산이 보였다. 에릭 요한슨이 초현실주의 사진가라고 하는데 전시장에 올라가는 순간도 현실이 아닌듯 느껴진다. 아득하다. 


 60층에서 내리면 전시장 입구 앞에 작은 전망대가 나온다. 100층이 넘는 빌딩이 흔해졌다 해도 60층 높이도 까마득하다. 요근래 열심히 찾아 다닌 서울의 곳곳이 친숙하다. 다른 시점에서 바라보는 광경이 낯설기도 하다. 익숙함과 낯섬 사이에서 시선이 떨렸다. 인간은 이 사이에서 헤매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 사이의 긴장감이 인간의 삶을 휘감고 있다. 초현실과 현실 사이의 긴장이 익숙함과 낯섬 사이의 긴장과 같다.  


 전시를 관람하기 전날 에릭 요한슨이 어떤 작가인지 찾아봤다. 1985년 4월 스웨덴에서 태어나 주로 체코 프라하에서 활동하는 초현실주의 사진가라고 한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Full Moon Service”를 보면 무슨 뜻인지 바로 알 수 있다. 이번 전시에도 소개된 작품이다. 


Full Moon Service, 2017

 달은 지구의 주위를 돌기 때문에 모양과 크기가 날마다 변한다. 그런데 요한슨은 일꾼들이 매일 하늘에 달을 매달고 있다는 상상의 세계를 구현했다. 이 작품 속에 물건이나 사람은 컴퓨터 그래픽이 아니다. 풍경, 사람, 사물 모두 철저하게 구상된 틀 안에서 각각 촬영해 합성했다. 현실을 재료로 상상의 세계, 초현실을 표현했다. 에릭 요한슨은 창의력이 넘치는 아이디어를 치밀한 구성으로 만들어 뛰어난 컴퓨터 사진 기술을 활용해 현실보다 더 실감나는 그만의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한다. 달이 지구의 주위를 공전한다는 사실을 알아도 이 작품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현실과 초현실을 가로지르는 사이에서 펼쳐지는 떨림이 미적 쾌감을 불러 일으키고, 감정을 변화시킨다. 가장 황홀한 초현실은 머나먼 시공간에 있거나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신비한 이미지가 아니다. 세심하게 관찰한 주변에서 나온 아이디어에 바탕을 둔, 아이같은 마음이 풀어낸 초현실이 가장 환상적이다. 에릭 요한슨은 이처럼 현실과의 경계가 모호한 초현실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첫 섹션은 ‘혼자만의 여행’이다. 나는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만남과 낯선 경험을 통해 삶의 지평을 넓히는 여행은 혼자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에릭 요한슨이 구현한 혼자만의 여행은 어떤 감흥을 줄까?


Leap of Faith, 2018

 절해고도의 끝자락에 있는 낡은 전망대 같은 곳에서 정장을 입고 서류가방을 든 남자가 풍선을 하나 들고 막 뛰어내리고 있다. 발 아래에는 자욱한 안개 사이 산봉우리가 듬성듬성 보인다. 혼자만의 여행은 곧 내면의 여행이다. 내면의 여행은 이런 갑작스런 leap(건너뜀)이 아닐까? 휴가철에 편안한 옷을 차려 입은 후, 차에 짐을 가득 싣고 관광지로 떠나는 여행이 아니다. 우리는 출근길의 혼잡과 정체 속에서 갑자기 천애의 낭떠러지로 풍선 하나에 의지한채 구름 위를 떠다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요한슨의 작품은 움직임의 상황 속에서 절묘하게 잡아낸 정적인 이미지가 일품이다. 얼마든지 다이나믹하게 구성할 수 있을텐데 그러지 않았다. 날아오를지, 아래로 떨어질지 알 수 없다. 벼랑 끝에서 한걸음을 내딛는 그 순간의 농축된 에너지가 느껴지면서도 안정적이고 편안해 보인다. 풍선의 색채와 상승감이 없었다면 조금 지루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과하지 않은 귀여운 포인트 이미지가 작품 감상의 즐거움을 더한다. 


Impact, 2016

 이번 전시는 작품 외적으로도 흥미롭다. 우선 60층 높이에 위치한 전시장 덕분에 초현실주의 사진 작품을 보다가 현실의 서울을 조망할 수 있다. 주로 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와 메가시티 서울의 실제 모습은 현실과 초현실의 대비이다. 상상과 현실을 오가며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이 극명하게 펼쳐진다. 또 작품의 이미지가 전시공간에 연장되어 있어 현실 안에 구현된 초현실을 실감할 수도 있다. 인증샷을 찍기에 적당한 곳이기도 하다. 


 땅 위에 깨진 유리조각들이 이어져 맑은 호수가 된다. 작은 보트를 탄 남자는 호수와 땅의 경계에서 노를 들고 서있다.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는 어떻게 나누어질까? 어디가 현실이고 초현실일까? 호수일까? 거울일까? 우리는 우리가 감각하는 세상이 어떻게 실재라고 인식할 수 있을까?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일은 결국 뇌에서 이루어지는 신경 신호에 지나지 않을텐데 말이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이때 무엇이 실재인지 따지는 일은 부질없다. 그저 이끌리는 대로, 마음이 가는 곳으로, 자유롭게 경험하면 된다. 내면의 여행은 진실을 파헤치는 추리가 아니다. 경계를 허물고 사고의 지평을 멀리 펼치는 길이다. 




 두번째 섹션의 주제는 ‘내가 보는 세상’이었다. ‘혼자만의 여행’을 떠난 후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뀔까? 나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낯선 세상을 보고, 느낀 사람은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된다. 그렇게 본 세상은 이전과 같이 않다. 


Stuck Inside, 2020

세상을 바라보기 이전에 나 자신을 바라보면 어떨까? 내 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외면의 사람은 눈을 뜨고 무언가를 보고 있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한 모습이다. 그에 반해 머리속에 있는 내면의 사람은 무릎을 감싸고 눈을 감고 있다. 외로워 보이기도, 우울해 보이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태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현실 속의 수많은 관계와 일에 치여 무감각해지고 지쳐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판타지와 SF의 세계가 제아무리 낯설고 환상적이라도 그 안에서 펼쳐지는 존재들 사이의 문제는 현실과 다름없다. 실제로 우리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장면이지만, 더없이 현실적으로 보인다. 때로는 상상이 더 현실을 잘 표현한다. 그래서 위로받는다. 남들도 나와 같구나. 내 곁에 있는 누군가를 위로해주자. 다독여주자. 그럼으로써 나도 위로받고 나의 존재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Life Time, 2017

 바다 위에 떠 있는 둥근 시계, 시계 바늘 위에는 한 남자가 있다. 시간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그저 이어진다. 우리는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 바늘이 내려가면 그는 바다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시간을 나타내는 시계가 아무리 크다 해도 바다 위에서는 아주 작은 존재다. 어떤 말로도 담을 수 없는 우주는 시간조차 삼킨다. 시간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는 족쇄와 같은 운명으로 여기지 말자. 우리는 티끌만도 못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우주 전체를 담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예술 작품을 통해서, 또는 과학을 통해서 우리는 맘껏 뻗어나갈 수 있다. 작품 속 사내의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그 운명을 통찰하는 예술과 인간에 대해 생각하며 한참을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Iron Man, 2008

 어디부터가 옷이고, 어디부터가 몸일까? 디즈니 만화 <톰과 제리>의 에피소드에 나올 법한 이미지다. 작품 속 인물은 작가 자신이다. 에릭 요한슨은 미술이나 사진을 전공하지 않았다. 그는 컴퓨터 공학을 공부했다. 그가 가진 아이디어도 참신하지만 작품으로 구현해내는 그의 기술력도 대단하다. 어쩜 이리 자연스럽게 합성하고 구성할 수 있는지 놀랍다. 재치있는 작품들을 즐겁게 감상했다. 





 세 번째 섹션은 ‘추억을 꺼내 본다’는 주제 아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행, 관점에 이어 추억이다. 여행을 통해 얻은 새로운 관점은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된다. 나중에 이 추억을 꺼낼 때는 또 다르게 볼 수 있다. 어떤 변화가 나올지 기대하며 전시장에 들어섰다. 


Ideas come at Night, 2021

 이번 전시에서 본 작품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 사진이다. 멀리서 봤을 때 침대에 고요하게 누워 있는 사람과 그를 덮은 유리구 덕분에 아픈 사람을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가까이 가니 유리구는 백열전구였다. 옆에 있는 제목을 보고 감탄했다. 만화 같은 데서 뭔가 떠오를 때, 머리 위에 전구가 켜지는 장면을 넣는다. 현대 신경과학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자는 동안 뇌는 불필요한 기억을 지우고, 학습한 내용 중에 중요한 것들을 강화한다. 한의대 시험을 칠 때 많이 경험했다. 무작정 밤을 새기보다 조금이라도 자고 나면 시험지에 더 많이 쓸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는 동안 무슨 아이디어가 이렇게 많이 나왔을까? 아마 에릭 요한슨처럼 창의적인 사람인가 보다. 부럽다. 






 네 번째 섹션은 ‘나만의 공간’이란 주제로 작품들을 선보인다. 추억을 꺼내본다면 역시 나만의 공간에서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수많은 사회적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간다. 그러나 자신을 탐구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사회적 관계와 떨어져 있는 나만의 공간에서 우린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The Library, 2019

 숲 속에 불쑥 나타난 것만 같은 신비한 도서관이다. 책들이 꽂혀 있는 벽면은 내부처럼 보이기도 하고 외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직육면체를 이용한 착시 효과를 이용했다. 에릭 요한슨은 이처럼 착시를 이용한 작품도 많이 만들었다. 착시, 역설을 가장 잘 다룬 화가는 역시 에셔(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일 것이다. 요한슨은 에셔의 작품에서 모티프를 따온 작품도 여러 점 만들었다. 이번 전시에도 에셔가 즐겨 그린 ‘펜로즈의 계단’을 활용한 작품이 있다. 숲 속의 도서관 앞에 작은 소녀가 찾아가는 모습이 헨젤과 그레텔 동화를 살짝 비틀었지 않았나 싶다. 오래된 낡은 도서관과 숲이 주는 환상적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다. 이 곳에서 SF 환타지 문학을 읽고, 틈틈이 숲의 내음을 맡으며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싶었다. 


에셔, 올라가기와 내려가기, 1960년






 마지막, 다섯 번째 섹션은 주제가 ‘미래의 일상’이다. 추억을 되돌아봤다면 이제 앞도 내다볼 시간이 왔다. 내 미래를 따지기 앞서 인류의 미래가 불안정하다. 기후 변동, 환경 오염, 전염병, 빈부 격차, 정치적 긴장과 전쟁…… 밝음과 어두움을 재치와 유머로 조화시킨 에릭 요한슨답게 이번 섹션의 작품들도 그러했다. 


Cumulus & Thunder, 2017

 잘라낸 양털이 올라가 구름이 된다! 얼마나 멋진 상상이고 이미지인가! 그러나 작가가 목가적 풍경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표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의 것이 자연으로 가야 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인공물이 자연을 어지렵혀서는 안된다는 뜻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내 해석이 작가의 의도와 다를지라도 매우 귀엽고 즐거운 작품이 틀림없다. 


Demand & Supply, 2017

 모래시계처럼 생긴 섬 위쪽에 마을이 자리했다. 아래에서는 중장비들이 무언가를 파서 위로 올리고 있다. 결국 이 섬은 무너져 바다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인류의 문명과 미래에 대한 통렬한 풍자다. 에릭 요한슨은 미래를 나타낼 때 어두움을 외면하지 않는다. 인류가 맞닥뜨린, 바로 지금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기후문제나 불평등의 문제를 떠올렸다. 



 


 관람을 마치고 나왔다. 기발한 상상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기술로 창조한 멋진 사진 작품을 보면서 감탄했다. 주제별로 생각할 거리도 많았다. 특히 현실과 초현실 사이의 경계와 긴장을 내내 의식했다. 이번 전시는 내년 3월까지 이어지며, 그 후에는 다른 작품들로 2부 전시가 계획되어 있다. 어렵지 않은 주제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전시다. 가족과 같이 관람해도, 친구나 연인과 함께 와도, 아니면 혼자 와도 마음에 무언가를 느끼고 돌아갈 수 있으리라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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