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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중 하나는 거짓말

정왕역, 정왕역입니다.

by 승주연

며칠 전에 나는 오전 8시쯤 고려대학교에 가려고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을 탔을 때만 하더라도 나의 온 신경은 오로지 어떤 사람이 가장 빨리 내릴지, 나는 언제쯤 자리에 앉을 수 있을지에 가있었다.

모든 것은 평소와 다름없었고, 지하철도 분명히 내가 아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긴 뒤로 가는 경우만 아니라면 내가 아는 방향이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드디어 자리에 앉았고, 이제 편하게 삼각지역까지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드는 순간 내 시선이 전광판에 가 닿았고,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물론 내가 사물을 건성으로 보는 경향이 있고, 상록수역에서 삼각지역까지 이어져있는 모든 역을 모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거기엔 내가 정말 본 적도 없고, 가본 적도 없는 '정왕역'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이번 역은 정왕역입니다.'


정왕역이라...


하지만 그 위에는 당고개행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둘 중 하나는 사실이 아니란 뜻인데...


순간 나는 과장을 많이 보태서 빛의 속도쯤 되는 속도로 상록수역에서부터 지하철에 탈 때까지의 순간을 꼼꼼하게 더듬어보았다. 모든 것은 평소와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1 정도의 차이도 없이 완벽하게 일치했으며, 내 동선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나는 습관처럼 왼쪽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당고개행 지하철에 몸을 실었으며, 내가 탄 지하철이 오이도행이 될 확률은 내가 술이 떡이 되지 않고는 (지금까지 만취라는 상태를 겪은 적이 없는데 아침부터 만취라니... )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난 intj이므로...


늘 모든 일을 미리 준비하고, 계획을 즐기는 내가 변수나 서프라이즈와 맞닥뜨리면 난 최대한 빨리 사태를 수습해야 마음이 놓인다.


정말로 만약 내가 탄 열차가 삼각지역이 아닌 정왕역을 향해 가는 거라면... 난 최대한 빨리 열차에서 내려서 반대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려야 한다. 그래도 늦을 것이다...


이런 내 머릿속 복잡한 상황을 알기라도 하거나 그런 나를 안심시키겠다는 듯 열차 내에 기관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크게 들렸다.


''이번 역은 사당, 사당역입니다.''


그제야 난 안도했다. 그리고 전광판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았다.


난 하마터면 거짓말이어서 다행이었다고...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고 정광판에게 말할 뻔했다.


그건 그렇고, 정왕역엔 뭐가 있을까?


#번역작가 #출판번역가 #일상 #정왕역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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