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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좋은 아버지인 줄만 알았습니다”

끝내 지키지 못한 약속과 막내아들을 향한 마지막 절규

by EverydayRang 글밥집

2019년 11월 12일, 오전 8시 30분. 1005호 병실.

나는 다시 녹음기를 켰고, 이번에도 아버지는 전날 밤 떨리는 손으로 빼곡히 적어 두신 답안지를 꺼내셨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이것이 삶을 정리하는 마지막 시험처럼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1. ‘좋은 아버지’라는 이름의 착각과 늦은 후회


“자녀를 키우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버지는 한참을 종이를 내려다보셨습니다.

그리고 깊은 한숨과 함께, 당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처럼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늘, 항상 좋은 아버지인 줄로만 알았지.”

그 한마디가 병실의 무거운 침묵을 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고,
오만이었다는 것을
늦은 나이에 깨달아야만 했다.
가장으로서 중심을 잡고
가정을 이끌어야 했는데,
젊었을 땐 내 교만과 아집으로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과
따뜻한 일상을 만들어 주지 못했어.
못내 아쉽고 후회스럽다.”

아버지의 말은 본인 스스로에게 내리는 꾸짖음 같았습니다.

“아버지로서의 권한과 의무는
항상 비례하는 건데...
애들의 사고와 생각은 저만치 앞서 가는데,
나는 구시대적인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늘 갈등을 빚었지.
그래서 변해야 하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 뒤, 창문에 비친 병상에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습니다.

“세월은 또 그렇게 흘러
갑자기 찾아온 병마와 투병하면서,
이젠 천덕꾸러기인 짐덩어리로 (울먹임)
변해버린 나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 슬프고 괴롭지만…”


울먹이는 소리가 조용히 병실에 번졌습니다.

“그래도 살아있는 오늘에 감사하며,
삶의 자취를 조금이나마 남기고 가려고
오늘도 무던히 애쓴다.”

아버지의 소원은 단순했습니다.

완쾌되는 날,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하는 것. 우애롭게 지내는 자녀들의 모습을 보는 것.

“그날을 기억하며 모두 모두 건강해다오.”



2. 첫째 딸 ‘랑’에게: 오른쪽 발에 남은 평생의 상처


아버지에게 첫째 딸의 기억은 늘 ‘처음’이라는 단어로 시작했습니다.

“너는 생애 처음 접하는 생명체라 그런지,
유독 정이 많이 갔고 신기하기도 했다.”

경기도 원당에 살던 시절, 오토바이 뒤에 나를 태우고 서삼릉 골프장, 테니스장으로 놀러 다녔던 아련한 추억들.

그러나 아버지는 평생 당신의 마음에 빚처럼 남아있던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바로 제 오른쪽 발에 남은 교통사고 흉터였습니다.

“오른쪽 발에 교통사고 흉터가 남았는데
그땐 좀 더 여유가 생기면 꼭 성형수술을 해주리라 다짐했었는데
끝내 약속을 못 지키고 지금에 이르렀구나.
지금은 어떠한지 보고도 싶고,
미안하구나(울먹임).”

아버지의 후회는 그 상처의 깊이 만큼이나 아팠습니다.

성격이 사내다운 데가 있어 ‘화랑’에서 영감을 얻어 이름을 ‘랑’이라 지었는데, 이름에 걸맞게 잘 자라주었다는 말. 대학교 졸업식 때, 온 가족이 참석해서 축하 점심을 먹었을 때가 가장 뿌듯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결혼식 날.

“곱게 차려입고(울먹임…),
성당 결혼식장에 들어설 때,
기쁨보다는 애환과 슬픔이 더 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농협에서 불명예 퇴직하고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던 시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늦은 나이에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저에게 한없는 감사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투병 중에 있는 이 아비 수발드느라,
마음 고생이 많은 너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고 아프다(울먹임).”

아버지의 처음, 나의 전부

​아버지의 옥편.
내 이름 ‘랑’을 짓던 그 이틀 밤,
나는 그땐 몰랐다.
아버지 책상 위 먼지 앉은 옥편이
얼마나 무거웠는지도,
그 이름이 나를 향한
아버지의 세상 첫 번째 사랑 고백이었단 것도.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본 세상.
내 작은 몸이 전부였던 그 자리.
털털거리는 엔진 소리가 세상의 음악이었고,
아버지의 넓은 등은
내 인생에서 제일 안전한 집이었다.

서삼릉 잔디도,
농협 옆 테니스장 흰 선도,
다 아버지가 데려가 준 풍경이었다.

​그 날들이
아버지에겐 ‘처음’이라 설렜던 순간들이었겠지만,
나에겐
그게 그냥 세상이었고, 전부였다.

​나는 참 많이 받으며 컸다.
넘치도록, 부족함 없이.
처음의 사랑,
처음의 기쁨,
처음의 행복.
아버지는 나를 통해 ‘아버지’가 처음이었고,
나는 아버지를 통해
세상을 처음 배웠다.

​내가 아버지의 ‘처음’이었다는 사실이
나를 이렇게까지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빛났을 그때가,
내 인생에서는
가장 풍족했던 시작이었구나.




3. 둘째 딸 '혜진(가명)'에게: 경기도 xx동 지하방에서의 뺨


둘째 딸 혜진이 이야기에 들어서자 아버지의 표정은 더 무거워졌습니다.


“얘는 태어났는데 외모부터가 좀 특이했고
커가면서도 성격 또한 톡톡 튀는 데다가
약간 까칠했어.”

고등학교까지는 무난했지만, 대학 입학 때부터 가정 형편 때문에 학비 한번 제대로 못 내주고(울먹임)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던 점이 못내 아쉽고 후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경기도 xx동 지하 방에서 월세 살 때,
약간의 언쟁 끝에 화가 나서
걔 뺨을 한 대 때린 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고,
미안하고 사과한다.”

아버지는 그 짧은 순간의 폭력을 잊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머나먼 미국으로 시집을 가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딸. 결혼식도 못 올려 주고, 그 외로운 이국땅에서 강하게 버텨나가는 모습을 볼 때 대견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고 하셨습니다.

“입원 기간 동안 머나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준 마음에 고맙고 미안해서
얼마나 펑펑 울었는지(울먹임)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



4. 막내아들 ‘인영’(가명)에게: 돌아와 다오,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아 다오


그리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가장 많이 떨리던 순간. 막내아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셋째 역시 대학진학 시
학비, 기타 여러 가지로
뒷바라지 못 해준 게
늘 가슴이 아프고…”

경제적 어려움과 가족 간의 잦은 불화, 그리고 아버지의 고집스러운 모습은 결국 막내가 대학 졸업 즈음 집을 떠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 착하고 순진했던 애가
가출한 지 벌써 몇 개월이냐.
회복되면 어떡하든지 걔를 찾을 것이다.”

아버지는 막내의 부재를 인정하면서도, 간절한 절규를 남기셨습니다.

“돌아와 다오. 형제들과 다정하게 지내다오.
효림이에게도 멋진 외삼촌이 되어다오.
네가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아 다오.
(울먹임이 절규로 변함)”

막내의 군 복무 면회 날, 온 가족과 함께 잔디밭에서 점심을 같이 했던 그 유일한 추억만이 아버지에게는 마지막 가족사진처럼 남아있었습니다.



5. “왜 하필, 아버지의 생이었을까”


아버지는 수차례 저에게 되물었습니다.

“지금도 궁금한 것은
그 수많은 연구 주제 중에 왜,
하필 '아버지의 생'이었을까 하는
의문점이 있단다.

왜??”

나는 잠시 말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답을 드렸습니다.

“저는 박사과정 4학기였는데
아버지가 6월부터 편찮으셔서
제가 병간호하느라
연구를 잘 진행하지 못하니까,
지도 교수님께서 농반진반
아버지 간호하면서
연구를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마침 아버지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마음을 먹게 되었어요.
이런 과정이 저나 효림이에게
값진 유산으로 남을 것 같아서요.”

아버지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지나고 보니까 다 부질없는 짓들이었어.
내가 조금만 참고 조금만 양보하고
배려했으면 됐을 것을…”

아버지는 과거의 아집이 가족 구성원을 해체했고, 자식들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한(恨)을 준 것 같아 늘 죄스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6. 내가 왔다 갔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당신이 살고자 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도 왔다 갔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지.”

그 흔적이란, 자식들에게 좋은 추억을 많이 못 만들어 준 것이 한으로 남아, 외손녀에게까지도 그렇다는 미안함이었습니다.

“건강이 회복된다면,
여생을 가족들을 위해 살고 싶다.
그래서 생을 마감하고 떠났을 때,
그들에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추억으로 남는 내가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 이 외로운 병마와의 투쟁을
오늘도 멈추지 않는다(울먹임).”

아버지는 오늘도 병실에서 조용히 흔적을 남기고 계십니다.

당신이 왔다가 사랑했고, 후회했고, 끝내 자식을 놓지 못했다는 흔적.

그 흔적들이, 우리에게 가장 따뜻한 유산이 될 것임을 나는 믿습니다.


� 다음 이야기 예고: 삶은 화살과도 같았는가

아버지의 고백은 중년의 후회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어지는 3차 면담에서는 당신의 삶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시(詩)처럼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아동기를 '생(生)'으로, 청년기를 '노여움과 기쁨'으로, 중년기를 '애락(哀樂)'으로, 그리고 지금의 노년기를 '병사(病死)'로 정의하며, 후회와 미련이 가득한 삶의 종착지를 담담히 읊으셨습니다.

특히 "욕심부리지 말라"는 깊은 후회의 깨달음과, 삼 남매에게 물려주고 싶은 가장 간절한 유산이 무엇이었는지 공개됩니다.

다음 편에서는 아버지의 생애사 3편: “인생, 그 자체는 유수와도 같은 것이었다”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회고를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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