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에 갈 일이 생겼다. 고등학교 절친 신년모임을 대천해수욕장 인근에서 하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 어디 구경할 만한 곳이 없을까? 찾다가 이번에는 30여 분 시간은 더 걸리지만 부여 읍내를 경유해서 가기로 했다. 지난해 12월 말 국립부여박물관 3층에 백제금동대향로 단 한 점을 위한 전시관을 개관했다고 하기에 박물관 문화재와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보기로 정했다.
충남 부여군의 국보는 총 7점이다. 백제금동대향로,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전 논산 청동방울 일괄, 무량사 미륵불 괘불도,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다. 어딜 가나 괘불도는 보기 어렵다. 그나마 나머지 다섯 점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박물관에서 500m 밖에 안 떨어져 있어 한 번에 보고 가기에 딱이었다.
토요일 오후 국립부여박물관에 먼저 들릴 계획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부여 읍내에 거의 다 도착할 무렵 날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강풍이 마구 불고 날은 흐린 데다 기온도 급하게 떨어지고 있어 곧 눈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실외를 먼저 보자는 생각으로 정림사지 5층 석탑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석탑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현 국립중앙박물관장인 유홍준 교수가 쓴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권 -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에는 부여 유물, 특히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이야기가 5페이지에 걸쳐 나온다. 그는 안목 있는 미술사가에게 가장 백제적인 유물을 꼽으라고 하면 서산 마애불,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산수문전과 함께 정림사지 5층 석탑이 반드시 꼽힐 것이라고 하면서, 특히 이 5층 석탑은 백제 미학의 상징적 유물이라고 강조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현존하는 백제 석탑 중에 으뜸이다. 화강암 석재 149매를 짜 맞춰 1단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세웠고, 높이는 8.9m다. 지붕돌의 부드러운 곡선과 어느 면에서 봐도 균형 있는 모습은 세련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과거에 평제탑이라고도 불렸다는데, 탑 1층 탑신에 신라와 함께 백제 사비성을 함락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 왕과 신하를 포로로 잡아간 사실을 기록한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 새겨져 있어서다. 나당 연합으로서는 승전이고, 백제로서는 상처다.
유홍준 교수의 글에서처럼, 정림사지 5층 석탑은 평평하고 넓은 사찰터에 덩그러니 놓여 있어 멀리서 보면 왜소해 보이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웅장함이 드러나고 상하좌우 대칭의 비율이 뛰어나 우아하게 와닿는다. 어느 페친러가 아들이 이 탑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빠져 몇 시간 보고 왔다는 글을 올렸다. 여유가 있으면 나도 좀 더 보겠지만, 이 날은 갈 길도 멀고, 볼거리도 남아 탑의 사면을 한 바퀴 돌고, 사진을 몇 컷 찍고, 뒤편 건물 안에 있는 정림사지석조여래좌상(보물)과 정림사지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왔다.
주차장으로 가는데 눈이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차에 타서 서둘러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우산을 쓰고 제일 위쪽에 자리 잡은 전시관으로 직행했다. 예전에 왔을 때보다 관람객들이 훨씬 많았다. 순서대로 선사 고대문화 관람실부터 들어갔다. 그곳에서 국보 '전 논산 출토 청동방울 일괄(傳 論山 靑銅鈴 一括)'을 보았다. 청동기시대 의식을 할 때 흔들어 소리 내던 청동방울로, 충남 논산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해진다.
앞에서도 한 번, 뒤로 가서도 한 번 청동방울을 보았다. 팔각형 별모양이 팔주령, 포탄 모양이 간두령, 아령 모양 쌍두령, X자 모양이 조합식 쌍두령이라고 했다. 청동기 시대가 기원전 1000년 전후이니 3천 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당시의 주조기술로는 모양 내기가 상당히 어려웠을 것 같은데 참으로 독특하고도 뛰어나 보였다. 故 이건희 회장 기증 유물 21,693점 중 하나로, 2024년부터 상설 전시되고 있다고 했다.
선사문화관을 나와 2전시실로 갔다. 그곳에 국보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이 있었다. 백제 시대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형태의 사리장치라고 한다. 기록이 남은 유물은 가치가 높다. 이 사리함도 공양자와 연대가 정확히 밝혀져 있기에 의미를 알 수 있다. 감실의 좌면과 우면에 각각 10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백제창왕십삼계태세재, 정해매형 공주공양사리(百濟昌王十三季太歲在, 丁亥妹兄 公主供養舍利)’로, “백제 창왕 13년 정해에 매형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뜻이다. 기록은 이렇게 중요하다.
2전시실을 나와 이동 통로를 따라 3층 백제대향로관으로 이동했다. 이날 관람의 하이라이트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까지 올라갔고 내리자마자 왼편에 마련된 단독 전시관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조명 아래 백제 금동대향로가 유리관 안에 빛을 뿜고 있었다. 사면으로는 사람들이 둘러싸서 향로를 하나하나 유심히 들여다보거나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국보 중에 국보라는 금동대향로를 앞에 두고 나도 자리를 옮겨가면서 향로를 눈에 담기 시작했다.
1993년 12월 부여 능산리 사찰터에서 발굴되었다는 백제금동대향로. 어떤 작품과 비교해도 최고의 빼어남이 아닐까 싶다. 62.3cm 높이에 11.85kg 무게. 크게 4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가장 위의 봉황장식, 뚜껑에는 42마리의 동물, 5인의 악사, 12명의 인물이 74개 봉우리 사이에 있다. 향로 몸체는 반원형으로 연꽃이 장식되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생동감 넘치는 용 모양 받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봉황의 가슴팍에는 2개의 구멍이, 향로의 뚜껑에도 열개의 구멍이 있어 향을 피우면 향연이 피어오른다고 한다.
10여 분 자리하다가 떠나야 할 시간이 점점 가까워져 전시관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 불교문화관인 3전시실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나머지 2개의 국보를 차례로 만났다. 먼저 본 작품이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다. 왼쪽부터 청동제 사리합, 은제 사리호, 금제 사리병이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사리기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사리장엄구라고 한다. 가까이서 보면 크지 않고 조그마하다. 작지만 섬세함이 돋보여 공예미가 뛰어나다.
마지막으로 보게 된 국보가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이다. 1907년 규암면 절터의 무소솥에서 금동관음보살입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머리에 삼면보관을 쓰고 정면 쪽으로 작은 불상이 장식된 것으로 관음보살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오른손에는 구슬인 보주를 들고 왼손은 아래로 내리고 있으며, 구슬장식은 어깨에서부터 허리의 연화장식을 중심으로 무릎까지 X자 형태로 교차한다. 허리가 잘록해 보이고, 다리가 길게 표현되었다.
유홍준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이 보살상을 '미스 백제'라는 표현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 수려한 몸매와 맵시 있는 몸가짐, 귀엽고 복스러운 얼굴에서 당대의 미인, 말하자면 '미스 백제'를 보는 듯한 착각조차 일어난다. 뒷모습이 유난히 예쁜 이 보살상은 한때 일본에 약탈될 뻔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는데 얼마 전에는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시킨다는 보도가 나왔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 p349 -
이렇게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국보 5점과 다양한 문화재를 모두 관람하고 건물을 나왔다. 박물관을 다 보고 나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요즘 어느 국립 박물관을 가도 느끼는 부분이지만, 박물관 공간이나 전시가 예전보다 훨씬 수준 높게 준비되어 기대 이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공간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것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도서관도, 박물관도 우리 일상에서 가까이한다면 정말 살아있는 공부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목적지인 보령을 향해 떠났다.
<참고내용> 국립부여박물관 리플릿 외, 정림사지 리플릿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