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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킨디센터 Nov 28. 2019

파쿠르 기후위기 선언

기후위기를 온 몸으로 겪는 '몸의 인류들'에게 고함


여름에는 폭염이, 겨울에 혹한이 오는 것이 익숙해질 무렵, 

기다렸던 봄과 가을은 먼지로 가득찼습니다.

야외환경의 최전선에 섰던 우리는 파쿠르 정신으로 변화에 적응하려 했지만, 

이내 변화가 아니라 위기임을 직감하게 되었습니다.


움직임의 자유를 가능케 했던 도시 장애물과 산 속 바위들은 

더이상 우리를 반기지 않습니다.

오염된 공기는 폐부와 목구멍을 틀어막고, 

뜨거운 콘크리트 바닥과 펜스를 짚었던 손바닥에는 화상으로 인한 진물이 흐릅니다. 

가시지 않는 매서운 추위는 손꼽아 기다리던 계절의 순환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파쿠르의 계보를 이어갈 어린이와 청소년은 

더이상 놀이터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작금의 세대는 축적되지 못한 채 단절되었습니다.

자연에서 태어나 문명의 이기(利器)를 딛고 인간의 자유를 외쳤던 파쿠르는 

본연의 바깥둥지를 잃고, 

우리가 비판해 마지않았던 인공시설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함께하는 동료와 가벼운 면 옷 한 벌, 신발 하나로 족했던 파쿠르는 

발전, 성공이라는 맹신(盲信)으로 

각양각색의 카메라, 컴퓨터, 플라스틱, 1회용품, 화려한 옷과 신발, 

에어콘, 히터, 인공 장애물을 짓고 부수고 소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려 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욕심이 우리 스스로를 파괴시키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더이상 파쿠르가 자연적인 움직임의 예술이라 말하지 못합니다. 

기후위기의 최전선에서 기후위기를 초래하는 또 다른 문명의 이기로서 기능하고 있으니까요.


길가에 널린 잡초 하나조차 세상에 의미없이 던져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망은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할 뿐, 지구 전체를 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된 고뇌 속에서 발견한 단 한 톨의 희망의 씨앗은 

파쿠르의 근원인 이타심(Altruism)입니다.


<산호초를 따라서>를 보았을 때, 

바다의 위기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끼고 있는 

전 세계 다이버들이 연대하는 마지막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들이 바다의 첨병(尖兵)이라면, 우리는 도시의 첨병입니다. 

상처는 숨기면 숨길수록 곪듯이 

우리가 발 벗고 나서서 기후위기를 앓고 있는 도시의 아픔을 기록하고, 

세상에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듯, 

드러난 아픔은 성찰 없는 발전과 성공을 향해 내딛었던 고삐 풀린 마차를 

소통과 재생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 길의 끝에서 나와 너가 다르지 않음을, 

너를 통해 나를 발견하고, 

다시 지구와 내가 다르지 않음을, 

지구를 통해 나를 발견하는 '하나됨(Oneness)'을 회복할 것입니다.



- 세계 파쿠르 커뮤니티 기후위기 선언 참가자 일동 -





함께 보기 원탁의파쿠르#2. 기후위기시대 파쿠르

https://brunch.co.kr/@krkd/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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