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생이 끓인 누룽지 죽

토사곽란 환자를 위하여

by 오순이

1939년생 나의 아버지 이정우 씨는 위로 누나들만 수두룩 있는 11남매 중 아래에서 세 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대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상고를 졸업했지만 할아버지로부터 농토를 물려받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농부가 되었다. 목장 들어가는 산길에 오동나무를 촘촘히 심느라 그의 손가락 마디가 굵어지던 즈음, 인생의 반려자 박숙자 여사를 만났다.


나의 어머니 박숙자 여사는 귀하게 큰 외동딸이었다. 마을에 단 한 명 있었던 세라복 입은 여고생이었고 여고를 졸업하고 여군에 지원하려고 감히 계획을 세웠으나 집안의 반대로 군인이 되지 못하고 시집을 왔다. 신랑 얼굴은 결혼식 날 처음 보았다. 부잣집인 줄 알고 시집왔더니 천상 농사꾼 집안이더란 푸념은 접어둔 채, 그 시대를 살아간 모든 여자들이 그랬듯 남편을 천생배필로 여기고 살았다.


나는 가끔 나의 소개팅 경험을 떠올리며 생각해본다. 결혼식날 얼굴을 처음 대면한 둘은 짝이 마음에 들었을까. 물릴 수 없어 같이 산 걸까, 사랑해서 같이 산 걸까. 둘이 평생 애정 표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있나.


박숙자 여사는 계획한 인생플랜이 어긋났지만 미련을 갖지 않았다. 결혼 후, 오랜 기간 자리보전하고 누운 까탈스런 시어머니를 불평 한 마디 없이 모셨다. 장날마다 돌아오는 끝도없는 손님치레를 군소리없이 해냈으며, 아이들 넷을 낳아 잘 건사했고 시누이들과도 정겹게 지냈다. 심성이 너그러운 한편 몸까지 튼튼하여 새벽 5시에 일어나 소죽을 끓이며 하루를 시작하고, 밤 10시에 아이들의 구멍 난 양말을 기우며 잠들었지만 시집온 지 15년이 지나도록 병치레 한 번을 안 하고 살았다.


그러던 중,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박숙자 여사가 그 이름도 낯선 병 토사곽란을 만나 며칠 째 거동을 못하는 일이 생겼다. 15년 내내 흔한 감기조차 걸리지 않던 튼튼한 며느리가 한 번 앓기 시작하니 오지게 앓아누웠다. 아이들은 아픈 엄마가 너무 낯설고 무서워 환자 방문 앞을 서성이기만 했지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혼기가 차도록 시집을 안 가고 집에 있던 옆 마을 사촌 언니가 우리 집으로 와서 밥도 해주고 환자 병구완도 해주었다.


병이 회복기에 접어들었을 때의 어느 점심 나절이었다. 뜬금없이 내게 미음을 끓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병구완을 해주러 온 사촌 언니는 잠시 볼일을 보러 나갔고, 할머니는 화상으로 병석에 계셨고, 언니는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있었고, 아들 둘은 고추가 달렸고. 미음을 끓여야 할 사람은 우리 집에서 나밖에 없었다. 집에 아버지가 계신데 중1인 내가 왜? 하고 자문해 보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원래 부엌에 안 들어가는 사람이니. 그때만 해도 시골에서 중학교 1학년이면 농사일이며 집안일이며 즈이 밥값은 너끈히 해내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러니 미음 한 끼 차리는 것이 뭐가 대수랴.


할머니는 언니가 기숙사에 들어간 후부터 자주 내게 말씀하셨다. 큰 말이 없으면 작은 말이 큰 말 짓을 해야 한다고. 나는 그때까지 집안의 선머슴아 같은 막내딸로 자라 형제들과 레슬링이나 할 줄 알았지 집안일을 배워본 적이 없었다. 달에 한 번 꼴로 돌아오는 제사 때 지지미 한 번 부쳐본 적 없던 내게 결국 내키지 않는 큰 말 짓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밥죽이렷다. 밥죽이라 함은 밥과 물의 하모니, 물에 밥 말아먹는 것과 비슷한 이치.


나는 대충 밥 두어 덩이에 물을 한 바가지나 냄비에 붓고 불위에 올려 허여멀건한 밥죽을 끓였다. 끓인 죽에 숟가락을 꽂아 냄비째 환자에게 들고 갈 양이었다. 밥상을 들고 부엌을 나와 마당을 가로지르는 순간 뒤에서 이정우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죽 이리 함 갖고 와 봐라."


선머슴아 같은 막내딸의 죽 끓이는 솜씨가 못 미더웠던 걸까. 끓인 죽을 가져갔더니 그는 눈으로 한 번 훑어보고는 내가 끓인 죽에 대해 이렇게 혹평했다.


"죽도 음식이다. 모든 음식은 정성이고. 입맛 없는 환자가 묵을라카머 밥죽을 끓여도 최대한 맛있게 끓여야 안 되겠나. 이래 밍밍 하이 끓여논 거로 묵고 병이 낫겠나. 욜로 와가 죽 우예 끓이는지 함 봐라."


대단치 않은 작품이지만 나의 첫 죽이 거절당했다는 상실감은 생각보다 컸다. 나는 내키지 않은 걸음걸이로 어기적 어기적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석유곤로에 불을 켜고 냄비를 올려 불에 달구었다. 그리고 달궈진 냄비에 기름칠도 하지 않고 밥 서너 숟가락을 넣었다.


치이익--


달궈진 냄비에 밥 눌어붙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는 지글거리는 밥알을 전 만들듯이 냄비 바닥에 꾹꾹 눌러 폈다. 밥알들이 냄비에 눌어붙기 시작하며 곧 노릇노릇한 누룽지가 되었다. 고소한 냄새가 부엌에 퍼졌다. 물을 조금씩 넣으며 계속 저어주자 고소한 누룽지 죽이 되었다. 누룽지 죽을 사기그릇에 예쁘게 담았다. 이정우 씨는 소젖 짜던 뭉툭한 손으로 왜간장, 식초, 참기름 두어 방울 떨어뜨리고 참깨를 뿌려 간장소스를 만들었다. 거기다 신 김치까지 잘게 썰어 한 보시기 밥상에 얹었다. 간소하고 정갈한 밥상이 되었다. 요리하는 그의 손매가 예사롭지 않았다. 처음 하는 솜씨가 아니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은 이정우 씨가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 그는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합의 6년을 객지에서 유학하며 연년생인 남동생 둘을 걷어 먹였다는 것. 그래서 각종 국과 밑반찬, 도시락 반찬 정도는 쉽게 만들어 낸다는 것. 심지어 김장김치, 물김치, 오이소박이도 담아봤다는 것. 그러니 그에게 누룽지 죽 정도 끓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나는 그 죽을 내가 끓인 양 당당하게 들고나갔다.


설사병으로 힘이 다 빠진 박숙자 여사는 딸이 가지고 온 누룽지 죽을 맛이나마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 술이 힘겨웠지 둘째 술부터는 술술 들어갔다. 번갈아 가며 죽 한 숟가락에 간장, 죽 한 숟가락에 김치. 어느덧 죽 그릇도 김치 종지도 다 비워졌다.


"우리 어무이 누룽지 죽 한 그릇 뚝딱 했네. 입맛 돌아온 거 보이 인자 곧 나을랑갑다. 놀라지 마래이, 이 죽 아부지가 끼맀데이. 어또? 맛있제? 우리 아부지 요리 못하는 줄 알았디 완전 요리사 아이가?"


여기다 대고 박숙자 여사 슬며시 남편 자랑을 한다.


"느그 아부지 안해서 그렇지 하면 뭐든 다 잘하는 사람이다."


층층시하 삼시세끼 밥 먹는 자리도 늘 불편했던 며느리가 오랜만에 혼자 먹는 점심상이, 그것도 남편이 끓여준 죽이 달긴 달았던 모양이다. 죽 한 그릇을 다 비운 박숙자 여사, 누룽지 묻은 입가를 손으로 쓰윽 훔쳤지만 웃음 자국이 남았다.



1971년생이 끓인 누룽지 죽.


keyword